[펌] 애니메이션『프랙탈』로 보는 ‘기본소득(베이직 인컴)’① -- 선정우

뚝딱뚝딱 2012. 9. 3. 21:56


출처 : http://koreancontent.kr/770




애니메이션의 인문학적, SF적 배경 설정 (1)
:애니메이션 『프랙탈』로 보는 ‘기본소득(베이직 인컴)’①

선 정 우 (출판기획사 코믹팝 대표, mirugi.com 운영)


■ 애니메이션의 현실 반영
창작 작품은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고 사회가 작품 세계를 뒤따라가기도 한다는 사례는 많이 존재한다. 물론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도 사회상의 변화가 반영되는데, 그 중에서도 학문적인 분야의 최신 학설이나 이론, 새로운 과학적 연구 결과나 고고학적 발견이 작품에 반영되는 사례를 최근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90년대 이후 국내와 일본에서 최근의 애니메이션 작품이 과거와 다르게 애니메이션 마니아의 취향과 욕망에만 매몰되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또 반대로 그런 지적에 대해 추억에만 묻혀 현재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구세대의 잔소리라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과거에도 취향과 욕망에 충실했던 작품은 존재했고 현재에도 사회를 반영한 작품은 존재하고 있다. 한국 국내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 편수가 일본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다 보니 일본 애니메이션만큼 다양성이 보기 힘들었으나, 최근에는 『와라! 편의점』과 같은 어느 시간대에나 방영하기 쉬운 에피소드 중심형 TV애니메이션부터 『마당을 나온 암탉』과 같은 가족영화, 『돼지의 왕』이나 『은실이』와 같은 작가주의형 현실 비판 영화 등이 등장하며 보다 다양하게 현실이 반영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국내 애니메이션이 주로 현실 반영의 방법으로 그 시대의 사회상을 그려내는 것에 반해, 작품수가 훨씬 많은 일본에서는 보다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신 학설이나 이론의 도입이나, 새로운 과학적 연구 결과나 고고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한 작품의 제작이 그것이다. 지금부터 몇몇 일본 애니메이션의 사례를 통해 어떤 식으로 이런 시도가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 왼쪽부터 『와라! 편의점』(2009년부터 방영/조준영 감독), 『마당을 나온 암탉』(2011년 개봉/오성윤 감독), 『돼지의 왕』(2011년 개봉/연상호 감독), 『은실이』(2012년 개봉/김선아, 박세희 감독) 포스터.


■ 애니메이션 『프랙탈』에 도입된 ‘기본소득’ 개념
실제 작품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겠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이란 개념이 있다. 국가, 혹은 사회가 모든 구성원에게 기초 소득을 제공한다는, 요즘 한국에서라면 ‘궁극의 포퓰리즘’ 쯤으로 불릴 것 같은 정책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도 보이기 때문에 더더욱 한국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긴 요원할 것 같은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근래 여러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2009년을 전후해서 몇몇 정당에 공약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그런 개념을 2011년 일본에서 방영된 TV애니메이션 『프랙탈』에서는 적극적으로 배경 설정에 도입했던 것이다.

 

우선 ‘기본소득’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재산이나 노동 여부와 무관하게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균등하게 지급되는 소득을 말한다.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는 생계 곤란이라든지 무언가의 조건을 내걸고 그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만 지급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과 다르다. 종래의 사회보장제도는 그 시민이 복지 혜택을 받을 만한 정당한 자격이 되는지 심사하는 과정이 필요하므로 그 심사를 위한 행정 기구가 필요하지만, 기본소득의 경우에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1인당 일정액을 지급하기만 하면 되므로 관료 조직의 간소화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 기본소득을 저축이나 투자에 사용할 수 없고 오직 기초생활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빈부의 격차와 무관하게 빈자에게든 부자에게든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이 ‘기본소득’ 개념의 일견 불합리해 보이는 점을 해결하고자 하고 있다.

 

본래 기본소득 개념은 16세기부터 그 구상이 나왔고 18세기 말 영국의 사회사상가 토마스 페인이 주장했다고 한다. 본격적인 논의는 1970년대 유럽에서 시작됐고, 벨기에의 철학자 필립 판 파레이스가 1995년 제창하면서 단순한 공상 수준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로 제기되었다. 국내에서는 주로 좌파 계열 정당에서 이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데, 사실 기본소득 논의가 2000년대 접어들면서 세계적으로 제기된 배경에는 ‘신자유주의’의 영향도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자의 기본소득 연계의 의도는,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는 대신 생활보호, 최저임금제도, 사회보장제도 등과 같은 복지 정책을 전면 폐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국민에게 최저한도의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이 기본소득의 목적이다. 이미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많은 나라에서 국민연금, 건강보험, 실업보험, 의료보장제도, 의무교육제도, 육아수당 등 각종 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 기본소득은 이처럼 개별 보증을 넘어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방향으로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겠다는 제도인 것이다. 사실 모든 생활보장제도에는 한계가 있는데, 예를 들어 불평등성이 그 중 하나다. 이미 현행 소득세의 경우에도 상대적인 저소득층은 환급을 통해 일정액을 돌려주기도 하고 고소득층의 경우에는 높은 세율을 통해 많은 세금을 거두기도 하는 등 기본소득 개념과 별로 크게 충돌하지 않는 방향이 도입되어 있다. 다만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일본 경제학자 나카타니 이와오는 “가난한 사람들은 세무서에 들러 세금 환급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준비해 제출할 여유도 없고 그런 재테크 정보를 접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똑같이 세금을 내도, 세금 제도를 잘 아는 어떤 이는 환급을 받고 어떤 이는 환급을 받지 못하는 모순. 또 고소득층의 경우에는 본인이 세금 제도를 잘 모르더라도 높은 소득으로 인해 개인적인 세무 업무를 세무사라든지 외부에 전담시켜 쉽게 환급을 받고 저소득층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렇지 못하게 되는 불평등성. 이런 부분을 해소하자는 것 역시 기본소득의 목적 중 하나이다.


■ 애니메이션 『프랙탈』
『프랙탈』 애니메이션은, 22세기에 확립된 세계 관리 네트워크인 ‘프랙탈 시스템’이 인체에 심어진 일종의 나노머신을 통해 라이프로그를 수집하고 기본소득을 제공한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나, 사람들은 낙원과 같은 생활을 얻게 되어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개인주의 사회가 일반화된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사람들은 ‘도펠’이라 불리는 일종의 아바타를 통해서만 타인과 접촉할 뿐, 직접적으로 실제 인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부모 자식 간에도 좀처럼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너무 오랜 기간이 지나 에러가 쌓인 ‘프랙탈 시스템’은 붕괴의 위기를 겪게 되면서 일어나는 모험담이 작품의 주된 줄거리를 구성하고 있다.

 

『프랙탈』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나노머신을 통해 라이프로그를 정기적으로 프랙탈 시스템에 제공하면서 기본소득을 얻고 있는데, 이 기본소득은 저축이나 투자 등에 사용할 수는 없고 오직 기초 생활에만 쓸 수 있다. 그 기본소득을 바탕으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종래의 자본주의에서와 같은 고전적 시장 경제 시스템을 위해 별도의 통화도 존재하고 있다. 『프랙탈』 작중에서는 프랙탈 시스템의 노후화로 인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여 기본소득을 받지 못한 일종의 난민들이라든지, ‘로스트 밀레니엄 운동’이라 하여 프랙탈 시스템 탓에 인류가 타락했다며 기본소득을 거부하고 프랙탈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조직도 존재한다. 로스트 밀레니엄 운동의 조직은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는 등 과거와 같은 ‘노동’을 하자는 조직도 있고, 무장 투쟁을 통해 프랙탈 시스템을 파괴하려는 과격파 테러 집단도 등장한다.

 

애니메이션 『프랙탈』은 작품 외적인 문제 등으로 인하여 그리 큰 인기를 끌지 못했는데, 국내와 일본의 일부 시청자 중에는 간혹 『프랙탈』이란 작품의 실패 원인을 원안 담당인 평론가 겸 소설가 아즈마 히로키(주)에게 돌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프랙탈』 스태프 리스트에 ‘원안’으로 표기된 아즈마 히로키가 맡은 것은 이런 프랙탈 시스템이나 세계관의 설정 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아즈마 히로키가 『프랙탈』의 스토리나 캐릭터 부분의 중심적인 내용을 전부 다 맡았다면, 그런 경우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스태프 표기 방법에서 보통 ‘원작’으로 나오게 된다. ‘원안’은 그 작품의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정도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전체적인 내용은 감독 등과 같은 연출자나 ‘시리즈구성’으로 표기되는 각본 팀의 메인 스토리 작성자가 담당하게 된다. 『프랙탈』에서는 감독인 야마모토 유타카가 작품 전체의 방향성을 결정했을 것이고, 개별적인 스토리는 시리즈구성을 맡은 일본의 인기 각본가 오카다 마리가 담당했으리라 생각된다. 실제로 아즈마 히로키는 트위터 등을 통해 2011년 당시부터 본인이 『프랙탈』 애니메이션에 제한적인 참여밖에 하지 못했음을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역시 『프랙탈』 애니메이션판은 아즈마 히로키의 미래 세계에 대한 설정을 많이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나 캐릭터에 있어서는 각본가(‘시리즈구성’이란 직함)와 연출가가 중심적으로 진행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주) 아즈마 히로키:일본의 비평가이자 소설가. 현재 도쿄공업대학 세계문명센터 인문학원 디렉터 겸 특임교수이자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를 맡고 있다. 1993년 「솔제니친 시론」이란 논문으로 평론가 데뷔한 이후 1998년 출간한 저서 『존재론적, 우편적─자크 데리다에 대해』로 산토리학예상 수상. 그 후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2001년/한국어판 2007년),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2007년/한국어판 2012년), 『일반의지 2.0─루소, 프로이트, 구글』(2011년/한국어판 2012년) 등으로 비평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했다. 또한 2007년부터는 소설가로서도 활동을 시작하여 2009년 출간한 첫 번째 단독 저서인 SF 『퀀텀 패밀리즈』가 이듬해 미시마 유키오상을 수상하여 작가로서도 성공적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 평론가 겸 소설가 아즈마 히로키의 저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일본어판과 한국어판, 그리고 『일반의지 2.0』과 아즈마 히로키가 기획·편집을 담당한 무크지 『미소녀게임의 임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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