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미래 이후> ㅡ 하트&네그리 <선언> part 1

뚝딱뚝딱 2013.05.04 15:48


* Activism without full-time activists - 유목형에서 정주형으로의 운동 패러다임의 이행 (아랍혁명, OWS, 유럽 야영시위 등)

* Slience - 들뢰즈, 네그리

(27-28) 비포가 이 책에서 특히 고찰하고 있는 문제는 그런 정통 코뮤니즘에 내재된 주체적 정치 모델, 투사모델, 그리고 이것과 그리 멀지 않은 활동가모델이다. 비포는 행동주의가 자본의 무한하고 침략적인 힘에 대한 주체의 나르시시즘적인 반응이며, 활동가로 하여금 결국 좌절감, 우울함, 모욕감을 느끼게 할 따름인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비포가 보기에 반동의 시대, 사회적 장에서 정치적 창조성이 축출된 시대에 행동주의는 우울함을 떨치기 위한 필사적 시도가 되어버렸다. 욕망을 의무로 대체하게 될 것이었다.

(62-63) ‘행동주의는 반세계화 운동으로 인해 널리 영향력을 가지게 된 용어로, 반세계화 운동의 정치적 소통, 예술과 소통행위 사이의 연결성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됐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반세계화 운동이 과거와 단절하지 못했고, 20세기로부터 물려받은 개념적 참조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이제 우리는 20세기를 파국과 전쟁의 지점으로 몰아간 행동주의에 대한 갈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지 않을까? 자본의 지배로부터 인간의 에너지를 해방시키려 했던, 반복됐지만 결국 실패한 시도에서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하지 않을까? 경제적군사적 동원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의 자율을 향해가는 길은 활동 중지, 침묵, 수동적 사보타주로의 철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 The Mediatized Make the Truth

(92-94) 인터넷 생산의 영역에서 주의집중을 요구하는 재화의 압도적 공급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사회적 두뇌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공장이 불행의 공장이 된 이유이다. 인터넷 생산의 조립라인은 가상계급의 감정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착취하고 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인지노동자라는 것을, 끝없이 전기자극을 받는 살이자 몸이며 욕망이라는 것을.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우발적일 수 없다. 네트워크에 참여하려면 규칙의 준수가 요구되고 명령되기 때문이다. 떼를 통치하는 원리는 내면화이다. 떼의 구성요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내재된 자동작용에 의해 추동된다는 사실을 아예 알지 못하거나 적어도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 인터넷에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신비가 숨겨져 있다. 권위 없는 통제가 그것이다.”[케빈 켈리 인용] 접속은 의미나 애정 수준에서의 상호이해가 아니라 운영상의 복종을 요구한다.

 

* The Indebted Invert the Debt

(119-120) ‘부채개념은 미래를 놓고 벌이는 내기를 함축한다. 부채란 우리가 지금 소비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대가로 우리 미래의 일부를 넘겨주는 것이다. ‘라는 개념 또한 우리가 미래에 (아마도 내세에) 속죄해야 할 어떤 것을 지금 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함축한다. 일단 경제의 영역에서 보상의 원리가 동의되고 나면, 미래를 빌리는 시스템으로서의 신용이 가능해진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동학은 빌려온 미래에 투자하는 영구적 과정에 근거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현재의 대출과 미래의 변제 사이의 관계를 승인할 때 미래라는 관념 자체는 공통의 문화적 차원이 된다. 그런데 변제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죄와 속죄의 게임, 부채와 변제의 게임에 참여한 자들이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는다면,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 The Securitized Break Free

(126-127) 안보 이데올로기는 미디어가 부채질한 편집증의 산물이며 언제나 새로운 편집증을 먹고 살 수 있는 전지구적 안보경제 체계를 만들어내도록 설계됐다. “삶의 질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이는 전쟁 선전 문구 중 진실에 부합하는 유일한 문장이었다. 인류의 20%는 전 세계 자원의 80%를 소비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이 시나리오 전체를 바꿔놓았다. 근본주의적민족주의적 광신과 나치-자본주의적 광신 사이의 편집증적 충돌이라는 틀 속에 3의 행위자가 출현했다. 이들은 911 이후 우리가 기다려왔고, 기업에 대항하는 전지구적 운동의 굳건한 노동으로 구축된 사람들이었다. 이 제3의 행위자는 2003215, 전 세계의 도시들에서 수백만 명이 이라크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행진했을 때 탄생했다. 그것은 전쟁을 퍼뜨리는 광기에 대항해 지구 전체의 일상생활이 들고 일어난 운동이었다. 우리가 215일에 목격한 것은 확장되고 급진화될 운명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실제로 그렇게 되려면, 사회 내부의 반자본주의적 갈등의 동력을 다시 작동시켜, 전쟁을 종식시키는 과정을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지배를 종결하는 것과 연결해야한다.

(148-149) 911 이후 안보에 대한 편집증이 모든 상상계에서, 첨단 기술 재화의 생산에서, 도시설계에서 주된 경향이 됐다. “공포 경제는 전반적인 기근의 와중에서도 성장하고 있다. 안전이 물, 전기, 원격통신처럼 완전히 발달된 도시 서비스가 될 것이다.”[마이크 데이비스 인용] 공황의 도시에서 서로 가까워질 시간은 더 이상 없다. 욕망은 불안으로 변하고 시간은 수축한다.

 

* Being-together / Physical proximity

(144-145) 우리는 근래에 일어난 노동자 투쟁의 경험으로부터, 불안정 노동자들의 투쟁이 순환되지 않으며 의식성조직연대 같은 사회적 침전물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프랙탈화된 노동도 주기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이것은 어떤 투쟁의 물결도 일으키지 못한다. 투쟁들이 확산되어 순환 과정을 이루려면 노동하는 몸들의 근접성과 실존적 시간의 연속성이 있어야만 한다. 이런 근접성과 연속성이 없다면, 세포화된 몸들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조건들도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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