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손

사는 얘기 2013.11.01 18:23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상황에서 불현듯 과거의 따뜻했던 순간이 새록새록 피어나 가슴 한켠을 데워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안주로 나온 쥐포를 누군가가 먹기 좋게 찢어놨을 때.
혹은 영화관에서 암전이 됐는데 부시럭부시럭 간식꾸러미 소리가 날 때.
그럴 때면 어릴 적 고모와 영화관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고모랑 영화관을 꽤 갔었는데 그때는 <알라딘>을 봤을 때였다.
나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디즈니의 화려한 영상과 싸운드에 빠져버렸는데, 잠시후 고모가 손짓했다.
고모는 주전부리로 산 쥐포를 손으로 먹기 좋게 찢어놓고는 하나를 집어주었다.

그때는 마냥 쥐포가 맛있고 영화가 재밌어죽겠고 그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참 고마웠다.
사서 바로 뜯으면 꽤 뜨거운데 날 위해서 해줬구나. 뜯고나면 기름 묻어서 찝찝한데 날 위해서 해줬구나.
뭐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한번은 뜬금없이 우유를 마시다가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빨대를 꽂아서 마실 때.
우유를 거의 다 마시고 바닥에 조금 남아있을 때.
빨대의 위치를 조정하고 우유팩을 기울여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 없이 쪽쪽 빨아마실 때.

그럴때면 할머니의 손이 생각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렸을 때는 우유를 조금씩 남기기 마련이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실 요령이 없기 때문.
빨대와 우유팩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요령을 모르기 때문에 어느 순간 우유가 안 나오면 다 마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있게 우유팩을 내밀면, 할머니는 빨대와 우유팩을 기울여 내 입에 다시 물린다.
빨대를 쪽쪽 빨면, 참 신기하게도 '버리면 아까웠을 뻔했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우유가 나온다.

그때 할머니는 '아직 남았지'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셨다.
그리고 특유의 소리가 날 때까지 힘껏 빤 다음 내가 '아'하고 입을 쫙 벌리면 당신이 마신 양 좋아하셨다.
사실 표정이나 말, 행동은 흐릿하다. 약간의 상상이 가미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 손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다.
빨대를 잡고 우유팩을 내 쪽으로 기울이던, 한 방울도 놓칠 수 없게끔 빈틈없이 움직이던 그 손.

이제는 다 커서 쥐포를 찢어줄 손도, 우유를 먹여줄 손도 필요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 착한 손은 여전히 내 곁에서 내 삶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때로는 '잘했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때로는 '힘내라'며 내 어깨를 주물러주고,
때로는 '다 안다'며 내 등을 쓸어주고,
때로는 '아프지마'라며 내 배를 문질러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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