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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I 세미나] 곽노완,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

지필묵 2010. 1. 16. 09:16

■ 곽노완의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에 대한 리뷰


  곽노완의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은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발표된 것으로, “다양한 진보세력이 존경하며 연대하고 싶어하는 노동운동이 되기 위한 노동해방의 발본적인 새로운 방향성과 비전을 제안하기 위한” 글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노동운동의 위기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정규직노동자가 중심이 된 노조운동 및 노동운동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광범한 스펙트럼의 운동들이 노동운동의 중심성과 지도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것이 노동운동에 대한 비난이나 조롱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지만, 노동운동 역시 조건의 변화를 인정하고 중심성과 지도를 버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자에게 전통적 좌파의 노동운동과 신좌파의 사회운동이라는 구분은 노동과 노동해방에 대한 상이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동해방에 대해 전자는 “노동안에서의 해방”으로, 후자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사고한다. 노동에 대해 전자는 “노동이 모든 부의 유일한 원천이며 잉여가치 내지 이윤의 유일한 원천이 임노동에 대한 착취”라고 보는 반면, 후자는 “노동뿐만 아니라 지식을 포함한 모든 활동이 부의 주요한 원천이며, 모두가 사회적 부의 생산자이기 때문에 … 모두 착취를 당한다”고 본다. 그래서 저자는 부의 원천, 착취, 빼앗김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통합한 제3의 길을 제시한다. 맑스에게 빼앗김은 착취와 수탈이라는 두 가지 시공간을 갖는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빼앗김을 착취와 수탈의 결합으로 보는 저자에게 변혁의 주체 역시 빼앗기는 사람들, 즉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사람들 모두이다. 그리고 이들은 평등하다. 여기서 평등하다는 것은 변혁이 노동운동 아니면 신사회운동, 혹은 임금노동자 아니면 소수자들이라는 양자택일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 즉 ‘빼앗김’을 착취와 수탈로 개념적으로 구분한 뒤 분리된 것 두 가지를 결합하는 방식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유용한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시도는 착취에 대한 근대적인 정치경제학의 해석 - 노동가치론 - 에 근거하며, 그 틀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 즉 비임금노동의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수탈이라는 개념을 끌어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노동가치론의 틀을 삶의 전 영역으로 확장할 때 모든 생산은 가치의 생산인 동시에 착취의 대상이 된다. 빼앗김을 착취와 수탈로 구분하는 것은 일견 임금노동과 비임금노동을 모두 고려하는 것 같지만, ‘임금노동’(착취)과 ‘비임금노동’(비-착취)의 경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변혁의 주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양자택일에 대한 거부라면 이는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탈근대 정치철학의 조류 -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들뢰즈와 가따리 등 - 와 상통한다. 그러나 양자택일에 대한 거부는 “소수자들만이 변혁의 주역이거나 헤게모니를 갖는 것이 아니”며,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도 변혁의 주체”라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헤게모니에 대한 거부로 옮아간다. 이로써 저자는 생산과 운동에서 작동하는 헤게모니를 이론적으로 무력화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중심성’과 헤게모니를 혼동하는 데서 기인한다. 생산과 운동에서의 헤게모니는 압도적 비율이 아니라 ‘추동력’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적 소유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는 기본소득이 하나의 담론으로 제출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를, 즉 비물질적 생산에 사적 소유를 넘어설 - 공통적인 것을 구축할 -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저자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노동운동 변혁의 기획으로서의 기본소득’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과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한국형 기본소득 모델을 제시하는데, 특히 고용지대로 대부분의 재원을 마련하는 판 빠레이스의 모델을 비판하면서 한국형 모델을 강조한다. 저자가 설계한 한국형 모델은 “생산수단 및 토지의 사회적 공유로의 전환” 위에 “노동소득 + 사회연대소득/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을 통한 능력에 따른 노동의 촉진”하는 모델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고타강령비판」에서 언급되는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코뮤니즘 1국면]와 각자의 필요에 따른 동일한 분배[코뮤니즘 2국면]의 결합이다. 
  이러한 절충은, 착취와 수탈의 결합과 노동운동과 신사회운동의 헤게모니 없는 단순결합이 고스란히 이어진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비판되어야 할 것은 두 국면의 절충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의 근거이다. 저자는 “‘필요에 따른 분배’ 원리는 경제적으로 지속불가능한 유토피아적 기획”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노동유인이 크게 감퇴하여 경제적 성과가 크게 감퇴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유인이 필요한 노동’이라는 관념을 유지하면서 노동해방을 - 노동 안에서의 해방이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든 - 이룰 수 있을까. 저자는 나아가 “헌신적인 사람들이 게으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에서보다 적어진 파이 중에서 더욱 많은 것을 빼앗기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충한다. 저자가 언급한 게으른 사람들/이기주의자들의 역설은 인간본성에 대한 홉스적 관념을 떠오르게 한다. (‘노동해방’을 말하는 홉스!) 이러한 생각으로라면 기본소득의 자주관리는 물론, 그로부터 시작될 공통적인 것의 구축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위험한’ 사람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제3의 매개에게 양도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결국 이 글은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을 말하고 있지만, 사적 소유에 대한 인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저자는 “기존의 경제성과 중에서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던 부분(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을 강조하면서 고용지대에 의존하는 판 빠레이스의 모델을 비판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비판의 지점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저자가 말하는 빼앗긴 것에 대한 환수운동은 사적 소유 일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특정한 사적 소유에 대한 거부에 그치고 말 것이다.    


* 사족
- ‘노동소득 + 기본소득’에서 노동소득은 고용(고용주+사업장)을 전제하므로 그것은 곧 임금이다. ‘임금에서 소득으로의 전환’은 ‘고용에서 자주관리로의 전환’과 연동할 때 더 강력해진다. 
-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국적 프레임들. 전지구적 기본소득의 기획은? 세계단일통화만큼이나 전지구적 시민권도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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