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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멘붕'에 관하여

사는 얘기 2012. 5. 4. 00:07


흔히들 야구를 멘탈스포츠라고 한다.


사람이 하는 한 멘탈스포츠가 아닌 운동이 어디 있으며 분위기나 흐름이 중요하지 않은 운동이 어디 있겠냐마는, 야구는 다른 스포츠들과 달리 '타임오버'도 없고 '몇점 먼저 내기'도 아니기 때문에 '멘탈'이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케세라세라'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 즉 하다 보면 시간도 점수도 채워지기 마련이니 어떻게든 승부는 나게 되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수비의 경우 투구, 포구, 송구 하나 하나가 모여 아웃카운트를 만들고 아웃카운트 3개가 모여 상대의 공격을 멈춘다. 공격의 경우 타구 또는 선구 하나 하나, 진루 또는 도루 하나 하나가 모여 홈을 밟아 득점을 올린다. 아웃카운트 하나를 내주든 둘을 내주든 셋만 채우지 않으면 공격은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야구는 두번 다시는 없는 그'때'의 공 하나, 즉 '일구이무'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는 운동이다. 일구이무를 어느 쪽이 더 지배적으로 장악하는가 -- 그것이 삼진이든 병살이든 희생플라이든 실책이든 -- 가 승부를 가른다. 


이런 숨막히는 엄격함이 가장 강렬하게 작용하는 곳, 그러니까 제일 '빡쎈' 곳은 마운드일 것이다. 마운드 위의 투수를 '외롭다', '무너진다'라는 단어로 표현하곤 하는데, 이는 그만큼 마운드라는 곳이 '멘붕'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어제 기아-SK 전을 보면서 -- 종반만 봐야지 했는데 이건 뭐 종반이 경기전체의 절반;; -- 문득 이른바 멘붕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계속 맴돌았다. (아마도 내가 요즘 멘붕 상태이기 때문일 거다. '멘붕'이라는 말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이 강도를 어찌 표현했을꼬, 싶을 정도의 멘붕이다. 쩝.)


다시 경기 얘기로 돌아가서, 나를 놀라게 한 건 정우람의 멘붕이었다. 야구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지 몇 년 안됐고 또 스탯을 꾈 정도로 덕후도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가끔 시간날 때만 프로야구에 기웃거리는 정도여도 정우람이 국내 최고의 불펜 투수 중 하나라는 건 알기에,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기아에게 발리다니. (참고로 난 기아팬.)


사실 '발렸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나의 허접한 견해로 볼 때, 기아가 정우람을 바른 게 아니라 정우람의 멘탈이 붕괴한 것이다. ('발렸다'는 표현이 가능한 부분은 최희섭이 때린 안타겠지. 정우람의 올 시즌 첫 피안타.) 선동렬의 선수기용은 용병술이 아니다. (에이 설마.) 신인에게 기회를 준 정도로 봐야할 것이다. 이준호와 윤완주의 활약은, 그들의 피나는 노력을 고려했을 때는 필연일 것이나 선수교체의 측면에서는 우연이다. 아직은 존재감이 없는 의외의 선수들이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 우수한 투수에게는 외려 더 큰 변수로 작용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정우람이 그것만으로 흔들릴 클래스는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건의 재구성이고 그래서 일종의 소설인데, 내가 보기에 이준호의 안타까지만 해도 정우람은 괜찮았던 것 같다. '어, 내 공을 치네' 정도랄까. 물론 최희섭에게 맞은 올시즌 첫 피안타부터 신예 이준호에게 맞은 2번째 피안타까지 멘탈에 금이 가긴 했겠지만 실금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멘붕에 이르렀을까. 결정적인 것은 윤완주를 상대할 때 일어났다. 투 쓰리 꽉찬 볼카운트에서 던진 회심의 결정구가 볼 판정을 받은 것. 볼넷 자체보다도 자신의 결정구가 효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 더 충격이었던 것 같다. 


오늘 제구가 안되는 것도 아닌데, 어이없게도 심판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S존에게 졌다. 심판의 침묵은 '안됐지만 내 눈엔 빠진 걸로 보이는구먼'이라는 충격적인 메시지가 되어 뇌리에 꽂힌다. 그런데 하필 그 다음 타자가 확률상 정우람에게 매우 강한 김선빈. 결과는 알려진 대로이다.


외벽에 살짝 간 별 거 아니었던 실금들이 내벽으로까지 쫙쫙 갈라져 결국 아작이 나고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 이것이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멘붕의 형상이다. 내가 뜬금없이 야구경기 한 장면에 꽂혀 그것도 상대팀 투수에게 감정이입을 해가며 주저리주저리 끄적이는 것은, 그 모습이 내가 겪었던 그리고 겪고 있는 멘붕의 형상을 너무나 잘 구현해주었기 때문이다. 


몸쪽으로도 찔러보고 바깥으로 빼 보기도 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벌였던 볼카운트 싸움이 이상한 방식으로 종결되는 상황. 블론세이브고 나발이고, 팀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마운드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심정. 그런데 덕아웃은 움직일 생각을 않고, 불펜에서 누가 몸을 풀고 있나 신경 쓸 정신도 없고. 누가 나올지 대충 예상은 되나 내가 소방수인데 불을 내고 자빠졌구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고. 그런데 게임은 계속되고 있고. 


다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정면승부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투구수는 자꾸 늘어만 간다. 

승부에 무신경해진지 오래. 

그저 끝나기만을, 아이싱하는 순간만을 기다린다는 게 좀 찜찜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던져보자. 

야구 자체에는 타임오버가 없지만, 인간의 몸에는 타임오버가 있으니까. 상대팀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 그리고 한국 프로야구처럼 '무승부'란 것도 있다. 

더블플레이로 끝났을 때의 짧은 정적은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ㅎㅎ

'무승부'게임이 퇴출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때로는 허탈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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