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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리쉬 록 버전의 <잊을게>를 듣고 싶다

사는 얘기 2011. 3. 29. 16:54

지난 일요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나는 가수다>가 전파를 탔다. 프로그램의 만듦새도 그렇지만, 2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중간광고 없이 방송되는 걸 보니 사태를 수습하겠다는 제작진의 결의가 느껴졌다. 주말 황금시간대에, 그것도 대중의 이목이 일제히 집중된 상황에서 광고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꼼짝 않고 본방사수를 하고나서 든 느낌은 개운함보다는 찝찝함, 정확히 말하자면 서글픔이었다. 특히나 정엽의 탈락은 '의연하다', '쿨하다'라는 세간의 평가로 상쇄될 수 없는 서글픔을 안겨주었다. 탈락 자체가 서글플 것은 없다. 정엽 자신이 '이제 앨범 준비할 수 있겠다'고 말했듯, 이제 그 무겁던 짐을 내려놓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또 해야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그럼 무엇이 날 서글프게 만들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탈락 자체가 아니라 탈락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정엽은 YB의 <잊을게>를 미션곡으로 받고 자신이 평소 도전해보고 싶었던 장르라고 밝혔다. 그리고 중간평가 때 아이리쉬 록 스타일로 편곡한 정엽의 <잊을게>가 공개되었다. 나는 '브라운 아이드 쏘울', 즉 한국적 (넓게는 아시아적) 쏘울의 대표주자인 정엽의 변신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의 공연은 다듬어지지는 않았을지언정 구태의연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이승열만이 거의 유일하게 구현하고 있는, 윤도현이 말했듯 U2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리쉬 록 특유의 분위기가 정엽의 독특한 음색으로 빚어지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신선했다. 

그러나 중간평가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좋지 못한 게 아니라 '꼴찌'를 했다. 매니저 개그맨들이 위태로운 가수를 점찍으면서 일제히 정엽을 걱정한 것은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료가수들의 평가 역시, 청중으로서의 평가라기보다는 대중의 반응을 거의 무조건반사처럼 예측하게끔 훈련된 경험 많은 가수로서의 그것에 가까웠을 것 같다. '평소에 꼭 해보고 싶던 장르이지만 쉽지가 않다', '어설퍼지는 것 같다'고 토로하던 정엽은 결국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장르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가장 잘 하는'이라는 말은 뒤집으면 '늘 해왔던'이라는 뜻이 된다. 그의 공연을 보고 나는 너무나 속상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가수 정엽, 그 음색, 호흡, 테크닉은 모두 그대로였지만, 국내 최정상의 세션맨들과 악기, 음향장비도 모두 그대로였지만, 그의 공연은 무미건조했다. 그 공연을 보는 동안 내 머리 속에 그려진 것은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결혼식 피로연 장면이었다. 상투적으로 로맨틱한, <아메리칸 아이돌>의 싸이먼 코웰 식으로 얘기하면 호텔 라운지에서나 들을 법한 그런 공연이었다.  

그리고 정엽은 '꼴찌'를 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기왕에 떨어질 거 처음에 한 대로 아이리쉬 록 버전에 도전해볼 걸, 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는 왜 과감하게 '실험'을 하지 못한 걸까. 내가 느낀 서글픔은 여기에 있다. 과감한 실험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구도, 탈락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실험만을 허용하는 구도.   

다른 가수들이 미션에 임하는 모습도 서글프긴 마찬가지였다. 중견가수 백지영이 리허설에서 머릿 속이 백지장이 되는 경험을 하고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고,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해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국민가수 김건모가 마이크 쥔 손을 파르르 떨었다. 이소라는 공연을 진행하면서 '잘 하는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음'을, 그것이 '경쟁을 통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글쎄, 난 너무 서글펐다. 마치 내가 쌔디스트가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SM플레이를 끝낼 수 있을까.

김건모의 재도전 사태(?)로 일주일 내내 시끄러운 걸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다른 모든 뉴스들이 묻힐 정도로 이렇게 회자될 정도라면 그냥 써바이벌 형식을 버리고 공연만 하면 안되나, 라는 생각을. 물론 그것은 시청률 싸움에서 이겨야 하고 광고도 '완판'시켜야 하는 상업방송의 생리와는 맞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생각이 그다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가수다>의 핵심 컨셉 중 부정적인 측면인 '써바이벌'을 버리고 긍정적인 측면인 '미션'만 취하면 어떨까. 시즌제를 도입해서 7명이 한 시즌을 지지고 볶으며 실컷 놀고, 다음 시즌에는 또 다른 7명이 새 시즌을 꾸려나가는 방식은 어떨까. 그래서 이 프로그램의 역사가 쌓여서 10주년 리유니온 같은 걸 하면 어떨까.

나는 떠난 정엽을 비롯한 7인의 가수에게 아직도 듣고 싶은 게 너무나 많다. 팝을 부르는 것도 듣고 싶고, OST를 부르는 것도 듣고 싶다. 팀을 짜서 콜라보레이션 배틀을 하는 것도 보고 싶고, 자기 음반의 B side를 소개하는 것도, 내 인생의 노래를 소개하는 것도 보고 싶다. 진짜 파격은 165분 편성이나 써바이벌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작진이 자부하던 공연의 질 자체에 있다. 탈락이라고 표현하든 양보라고 표현하든 누군가가 '아웃'됨으로써 담보되는 질이 아니라, 가수의 자유롭고 새로운 실험을 통해 담보되는 질 말이다.

이런 파격을 꿈꾸며 한 달을 기다려보련다. 어떤 형식으로 재정비되든 첫 무대는 정엽의 <잊을게> 아이리쉬 록 버전이었면 좋겠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풀 버전은 듣고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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