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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일기

NUDA POTENZA 2011. 2. 15. 07:11

부산에서 맞는 일요일.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다.

고향집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보수동 책방골목이 나온다.
(동네이름이 보수동이라니... 부산에 살 땐 너무나 익숙해서 몰랐는데 지금은 좀 징그럽다.)
1박2일에서 이승기가 다녀갔다더니 그래서일까. DSLR을 둘러멘 사람들이 꽤 보였다.

책 몇 권을 사고 국제시장을 가로질러 자갈치시장으로 갔다. 
표지판 노선도에 한진중공업이라고 적혀있는 버스는 30번과 66번이다.
한진중공업이 워낙 규모가 큰 곳이라 태종대행 버스는 모두다 들르지 싶었지만,
어느새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 된 나는 그냥 안전하게, 혹은 소심하게 정류장 이름이 노출된 버스를 기다렸다.

십수대의 버스를 보내고 드디어 30번 버스에 올랐다. 
변함없이 터프한 부산 버스를 몸을 싣고 영도다리를 건넌다.
신공항 유치를 위한 현수막이 부산 시내에 빼곡하더니만 영도도 예외가 아니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에 섰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차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대학 1학년 때가 생각났다.
2003년, 부산으로 놀러온 동아리 사람들과 태종대에 갔다오던 길. 휘날리던 붉은 깃발과 울려퍼지던 쟁가.
그리고 피서객의 모습을 하고서 그 광경이, 그 소리가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던 나.
'체제순응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운동권'은 아닌, 
'좌파', '저항', 'ㅈ같은 자본주의', 뭐 이런 눈곱만큼의 감수성만 갖고 있던 시절의 나. 

횡단보도를 건너니 약간 살벌한 광경이 펼쳐졌다.
회사 정문을 가로막고 있는 25인승 정도 될 법한 버스는 유리창이 모두 박살나 있었던 것.
차마 그 모습을 찍진 못하고 건너편 건물을 찍는데, 경비아저씨가 보안 때문에 찍으면 안된다고 한다.
(그때는 약간 아니꼬왔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아저씨의 태도는 생각보다 상당히 상냥했다.)

  


'아, 네.'

대충 끄덕이고 고개를 돌리니 경비실 앞에 삼삼오오 불을 쬐는 분들이 보인다. 
근데 사수대인지 구사대인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난감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누가 봐도 소위 '외부인' 같은 젊은 남녀가 통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좀 껴서 들어가보려고 인사를 했다. 

'서울에서 온 학생인데요. 고향 내려왔다가, 어쩌고 저쩌고...'
'아, 저희도 통화해보고 있어요.'

출입절차는 민망할 정도로 간단했다. 그냥 출입기록만 작성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도 소속에 연구공간 L이라고 당당하게 기록했다.)
함께 들어간 분들은 민노당 <진보정치> 기자분들이었다.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못하고...)
당원도 아니고 단체회원도 아니고 그냥 혼자 왔다고 하니까 약간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괜찮다. 이제는 익숙하다.)

오른쪽으로 꺾어들어가자 농성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전기를 들고 뛰어다니던 꼬마 아이들이 다부진 억양으로 갑자기 말을 건다.

'용화상이 뭐에요?'
'응? 용화상?'

아빠가 뭔가를 알려줬나본데 무전이라 잘 못 들은 것 같았다. 한 아이가 무전기 너머에 있는 아빠에게 재차 묻는다. 

'용화상이 뭐야?'
'영화 틀어주니까 가라고.'
'영화? 우와!'

아이들은 신이 나서 어디론가 뛰어갔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니 평택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이젠 이름도 가물가물한 아이들.. 많이 컸겠지.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친구도 있겠구나.

농성장을 메운 현수막과 자보, 띠, 편지들은 마치 악귀를 막아주는 금줄처럼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한쪽에는 사수대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아, 김진숙님이 자랑하던 군고매가 저기서 구워졌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크레인.



크레인을 보자마자 숨이 탁 막혔다. 
어찌나 높은지 어지간히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카메라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다.
김진숙님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조차 안됐다.
기자라면 이것저것 물어라도 보겠지만, 
듣보잡 시민? 학생! 트위테리안! 삶정치적 활동가!!인 나는 그마저도 너무나 조심스럽다.
그냥 쥐죽은 듯이 글귀들을 읽어나갔다. 



제발로 내려가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잠그고 올라온 문이지만 제 힘으론 저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제가 걸어내려가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 때
여러분들은 문 여는 법을 잊지 말아주세요.




글로 감동주지 못하고
말로 감동주지 못해요
그냥 이 자리 말없이 지켜나갈게요 ^^
사랑해요 아주 많이 ^^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겠다 싶어 다가갔다. 
그래, 제일 만만한 게 학생이고 트위테리안이다. (삶정치적 활동가는 너무나 많은 맥락을 요하니까..)
아까처럼 '서울에서 공부하는 학생인데 고향에 왔다가 와봤어요'라며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한 분이 '트위터에서 보셨어예?'라고 묻는다.
'네, 트위터에서 소식 접하고 있어요. 물 드시기 시작한 것도 트위터에서 보고 알았어요.'
다른 분은 막걸리를 권하시고, 또 다른 분은 쏘세지를 권하신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숫기 부족으로 먹진 못했다.)

저녁에 문화제가 예정되어있어지만,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했다.
이만 가보겠다고 죄송하다고, 대신 트위터로든 뭐로든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진보정치> 기자분들께도 인사를 드리는데 인터뷰 해주시던 분(아마도 노조간부)이 저녁 먹고 가라고 하신다. 
나는 숫기 부족과 시간 부족으로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억수로 맛있는데... 나는 분명히 대접할라캤다'며 농을 던지셔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는 속으로,
'얼른 좋은 날 와서 숫기고 나발이고 벗어던지고 막걸리며, 쏘세지며, 군고매며 편하게 먹고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인사했다.






건너편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고 나오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남성들이 야광봉 같은 걸 들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함께 건너던 영도 주민들이 수군거렸다. 

한진중공업은 직장폐쇄를 단행했고, 또 다른 2명의 노동자가 크레인에 올랐다. 

그리고 폭설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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