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소득'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05.19 학생에게 임금을! : 학문후속세대에서 수업노동자로
  2. 2010.02.09 조건 없는 기본소득 UCC - Viktor Schreiber편 2
  3. 2010.02.05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전복에 관한 테제 2
  4. 2009.07.31 [펌] 기본소득을 향하여 - 좌익의 정치적 입장 (프로메테우스)

학생에게 임금을! : 학문후속세대에서 수업노동자로

지필묵 2011. 5. 19. 01:17

* 2008년 중앙대 사회학과 집담회를 위해 쓴 짤막한 글이다.
* 그때 나는 대학원수료생이었고, 지금 나는 논문제출기한을 넘겼는지 넘기기 직전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학생에게 임금을! : 학문후속세대에서 수업노동자로

 



  나는 1983년에 태어나 1999년에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다 1년 후 자퇴를 했고 2003년 또래보다 1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좌파적 감수성을 유지하면서 학부시절을 보냈고, 졸업 직후 극우파들이 ‘빨갱이사관학교’라고 치켜세워주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2006년 4월에 소위 연구조교 생활을 시작했고, 그 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2년 동안 학진의 녹을 먹었다. 그 사이에 영어시험과 종합시험과 프로포절 심사를 거쳤고, ‘준비중’이라는 대답만 1년 가까이 하면서 논문을 미뤄오다 요즘 겨우 마음을 잡았다. 2008년 11월 현재 나의 상태는 석사수료생. 예치금을 내야 책을 빌릴 수 있고, 늦어지는 논문 때문에 지도교수를 피하게 되고, ‘논문은 어떻게 돼 가냐’라는 질문과 ‘졸업하고 어떻게 할 생각이냐’라는 질문을 동시에 받는, 그러면서도 그것에 조금씩 무뎌져가는 대학원수료생이다. 이상이 ‘학문후속세대’로서의 나의 연대기이다.  

  그러나 모든 연대기에는 외전이 있는 법. 나는 대학원생으로 살아온 시간동안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시 논문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내가 남발했던 ‘준비중’이라는 대답은 사실 대부분 면피용이었다. 나는 프로포절 통과 후 논문을 쓰고도 남았을 1년이라는 시간동안 ‘딴 짓’을 하고 있었다. 논문의 참고문헌과 한참 동떨어진 『앙띠 외디푸스』를 강독했고, 영어가 아닌 에스페란토와 라틴어를 공부했다. 또 죽었다 깨어나도 등재지가 될 수 없는(그리고 될 필요도 의지도 없는) 「자율평론」[각주:1]을 편집했고, 대항대학을 표방하는 <다중지성의 정원>[각주:2]을 함께 만들어 학생이자 강사이자 만사(만드는 사람)로 활동했다. 이처럼 나는 소위 제도권과 비제도권이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을 동시에 경험했던 것이다.

  여기서 제도권과 비제도권이라는 구분을 사용하는 것은 양자를 경쟁시켜서 택일을 종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날 그 사이를 횡단하고 있는 학문후속세대의 처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실제로 제도권에 적을 두고 있는 많은 학문후속세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비제도권과 네트워킹되어있다. 제도권과 비제도권 간의 배타적인 구분이 극명해진 것은 신자유주의가 진행되면서부터이다.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대학에 대한 자본의 포섭과 훈육이 날로 심해지면서, 획일적인 지식생산구조(학부의 경우는 산학협력체제, 대학원의 경우는 학진체제)에 염증을 느낀 학문후속세대들이 비제도권 교육공간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를 ‘지식인의 죽음’과 ‘떠오르는 대중지성’으로 부르며 대결구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각주:3]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도권과 비제도권 사이에서의 배타적 택일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인 지식생산구조 속에서 유실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말이다. 

  우리를 지칭하는 ‘학문후속세대’라는 용어는 사실 나에게 낯설면서도 불편한 표현이다. 학문후속세대라는 말에는 뭔가 유예되고 있는 듯한 느낌과 재생산에 대한 강박, 그리고 자조 섞인 동일시(identification)와 구별짓기(distinction)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학문후속세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학생’이라는 사회적 존재가 띠는 모호성 때문일 것이다. 40년 전 유럽의 대학생들은 이미 이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투쟁의 모호함

학생으로서 가지는 우리의 조건은 특권자라는 사실이다. 대학 기구의 역할은 앞으로 우리를 유능한 지배의 조직자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데 있다. 대학은 이익 수단이다. 우리는 그 봉사의 댓가로서 간부가 되어 이 이익의 일부분을 분배받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학 개량 활동은 필연적으로 현대 사회의 착취를 강화시킨다. 때문에 우리는 자기 모순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각주:4] 


대학은 졸업장 공장이다. (중략) 학생은 완성되어가는 생산품이며 대학과 사회의 관계란 원칙적으로 전혀 배제된 관계에 서 있다. 학생은 미래에 완성품으로서 사회의 일원이 된다고 하는 점에서 지금은 사회의 일원일 수 없다. ‘미래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학생을 사회의 계층적 상황으로부터 배제시키고, 초월적 존재로 묶도록 근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모욕을 우리는 특권으로 감사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런가.[각주:5]


학생의 지위

현재 학생의 지위는 학생들에 의해 두 가지 결함이 지적되고 있다.

1. 학생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는 점

2. 학생이 고립되어 있다는 점[각주:6] 학업은 교육서비스라는 형태로 생산된 가치를 단순히 소비하기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또 다른 지적 가치를 생산하는 수업노동이다. 우리가 쓰는 발제문, 텀페이퍼, 나아가 학위논문을 생각해보라. 학교도 전공도 다른 사람의 논문에 인용되어 있는 자신의 논문,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블로그에 스크랩되어있는 자신의 글을 생각해보라. 더욱 미시적으로 보면 우리가 수업시간에 나누는 토론, 발제문이나 책의 한 귀퉁이에 해 둔 메모조차도 우리의 사유 속에 남아 새로운 사유를 창조한다. 이처럼 우리의 수업노동은 인류의 지식과 정보를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노동을 하면서 우리가 받는 임금은 고작 학점과 학위이다. 우리는 오히려 1년에 천만 원에 달하는 학비를 ‘지불’해야 하며, 수업노동을 재생산하기 위한 생활비 역시 각자 해결해야한다. 학업의 교환가치화는 졸업 이후로 유예되어있거나 아르바이트라고 불리는 극도의 불안정노동 속에서만 구현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나는 지적 노동을 주장함에 있어서 저작권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반동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가장 정교화한 것이 바로 등재지와 비등재지를 차별하는 학진과, 등재지 투고횟수와 SCI 지수를 점수로 환산하여 임용심사에 반영하는 대학이 아니던가. 이것이 낳은 결과는 ‘연구자가 아니라 논문기계가 되어버렸다’는 비참한 자아비판뿐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고립된 개인으로 사고하는 것과 맞서 싸워야한다. 우리의 노동을 사회적 노동이 아닌, 개인의 총명함이나 부지런함으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와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글을 쓰거나 토론을 하면서 인용하는 무수한 지식들을 떠올려보라. 우리가 가치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 즉 수업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생산물은 결코 사적 소유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산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68혁명의 대학(원)생들처럼,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업노동자들의 파업[각주:7]처럼 사회적 임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야한다. 제한적인 장학금, 한시적인 프로젝트 지원이나 유토피아적인 안정적 고용전망과 같은 개인들 간의 경쟁의 산물이 아닌, 최소한의 보장소득으로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요구해야한다. 이것이야말로 공적자금에 대한 진정한 재전유이다. 가사노동을 위해 투쟁했던 선배들처럼 외쳐보자. 학생에게 임금을!




  1. http://jayul.net [본문으로]
  2. <다중지성의 정원>에 대해서는 취지문을 참조하라. (http://daziwon.ohpy.com/146491/1) [본문으로]
  3.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후마니타스, 2008. [본문으로]
  4. 편집부, 『프랑스 5월 혁명』, 1985, 30쪽 [본문으로]
  5. 앞의 책, 31쪽 [본문으로]
  6. [/footnote]


      구좌파 진영에서 굳이 68혁명을 쁘띠부르주아지의 혁명이라고 폄하하지 않았더라도, 혁명의 당사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지위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모욕을 당하고 있는가. 학생이라는 지위, 학업이라는 활동은 과연 우리의 사회적 삶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가. 우리는 구좌파의 의심어린 눈초리처럼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착취로부터 유예된 노동자로, 고등교육이라는 특혜를 받는 특권층으로, 혹은 아카데미라는 온실 속에서 ‘한창 좋을 때’를 누리고 있는 철없는 이등시민으로 너무 간단하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너무나 일면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한 표현으로, ‘수업노동’이라는 다소 낯선 용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수업노동은 보통 ‘학업’, ‘학교공부’ 등으로 번역되어왔던 스쿨워크(schoolwork)라는 단어를 재전유한 것이다.[footnote]Cleaver, Harry, “On Schoolwork and the Struggle Against It”, http://www.eco.utexas.edu/~hmcleave/ [본문으로]

  7. 최근 이탈리아에서는 금융위기와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안인 젤미니법이 맞물리면서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학생들은 물론, 부모, 교사, 연구자들까지 시위에 동참하고 있으며, 공식적인 수업을 폐쇄한 채 야외수업과 자유토론이 벌이며 해방학교, 해방대학을 만들어가고 있다. 다음은 riseup.net의 money banks crisis라는 메일링리스트에서 받은 이탈리아 소식의 일부이다. In october classes start in universities: a university student movement emerges powerfully: "We won't pay your crisis!" It's a loud and clear message that speaks of the here and now, of precarity, economic crisis and the last gasps of neoliberalism. "Cut resources to bankers and war missions, rather than to schools and universities! we are the coming society! We are not the problem, we are the solution!" (중략) Week by week the mov't grows: from elementary schools, teachers, parents, kids are united in denouncing the decree; high school collectives network their struggles; in universities researchers other precarious faculty and professors start joining student assemblies and discussing with student collectives. (중략) In the subsequent days, mobilizations further develop: in Milano, Torino and other cities dozens of motions to faculty boards, class blockades, assemblies, all-night events take place in freed universities. The first experiments with alternative higher education occur: academic lectures are held in central public squares before hundreds of students and curious citizens, wihle students speak of "free university and free knowledg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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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없는 기본소득 UCC - Viktor Schreiber편

NUDA POTENZA 2010. 2. 9. 23:29

Unconditional basic income - Teaser - Viktor Schrei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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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전복에 관한 테제

지필묵 2010. 2. 5. 05:13

우리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뛰어넘어 조건 없는 보장소득으로 나아가야한다. 그것은 ‘기본 basic’이라는 한계에 대한 도전이다. ‘기본’은 물질적 부(현금/현물이라는 특정 형태의 부)를 평등하게(개별적으로) 분배하기 위해 설정된 기준이며, 따라서 한계로서의 ‘기본’은 항상 ‘최소한 minimum’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한정된 자원과 무한한 욕망’이라는 근대적인 정치경제학적 전제가 견고히 자리하고 있다. 이때 한정된 자원은 측정가능한 부를, 무한한 욕망은 결핍에 의한 욕망을 가리킨다. 그러나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오늘날 이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이제 자원과 욕망은 '측정불가능한 부와 창조로서의 욕망'이 갖는 헤게모니로 재해석되어야한다. 

우리는 비물질적 부에 주목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적어도 비물질적 부에는 ‘최소한’이 적용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비물질적 부 - 지식, 정보, 소통, 정동 등에 기반한 비물질적 생산물들 - 는 1일 권장 칼로리와 같은 수치로 환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술을 통해 무한복제가 가능하다. 즉 비물질적 부에 대한 요구는 소유권이 아니라 접근권을 주장하는 것이며, 비물질적 생산이 헤게모니를 갖는 오늘날 이것은 곧 생산수단의 재전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비물질적 부의 사유화를 강화하는 모든 디지털 엔클로저에 저항해야하며, 일정량의 물질적 부뿐만 아니라 비물질적 부에 대한 무조건적 접근 역시 보장소득으로서 쟁취해야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각종 경계를 부숨으로써 더 많은 소통과 더 많은 협력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유용한 것들을 마음껏 창조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보장소득은 개체의 재생산에 머물지 않고 소통과 협력의 재생산에 복무할 때에만 공통적 common 차원을 구축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의 구축은 보장소득이 낳는 결과가 아니라 보장소득운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기획이다. 보장소득운동은 ‘운동들의 운동’, 즉 온갖 정체성과 이해관계가 극복되는 특이성들의 공통화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생산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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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기본소득을 향하여 - 좌익의 정치적 입장 (프로메테우스)

뚝딱뚝딱 2009. 7. 31. 01:36
[번역] 기본소득을 향하여 - 좌익의 정치적 입장
프로메테우스 메일보내기

기본소득제도는 21세기형 사회복지 제도로 최근 세계 곳곳에서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최초에 일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고안된 기본소득제도는 브라질, 나미비아 등에서 정책화되고 있으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도 활발하게 정책 차원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홈페이지 자료실에 있는 원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독일에서의 기본소득 논쟁 지형과 좌파정당 안팎의 입장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글입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사회대안포럼(http://alternative-forum.tistory.com 운영위원장 금민)이 기본소득과 관련한 포럼을 연속으로 주최하고,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와 곽노완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가 한국형 기본소득 모델을 발표하면서 기본소득이 21세기 경제 대안 정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당은 기본소득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해 한국 정당 최초로 기본소득을 사회 의제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메테우스>

발표 / 카트야 키핑(독일 좌파당 부대표, 연방하원의원)

△ 카트야 키핑
무엇보다도 12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에 초대되어 여러분들에게 기본소득 아이디어에 관한 좌익의 정치적 입장을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점에 대해 매우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기본소득이 어떻게 쟁취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논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지배적인 정치 투쟁 안에서 우리의 처지가 어떤지를 분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본소득이 어떻게 실행되고 쟁취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독일에서 있었던 논쟁들의 간략한 개관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I. 독일에서 있었던 논쟁들의 개요

지난 5년에 걸쳐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대중성을 획득했습니다. 기본소득은 토크쇼와 신문 모두에서 토론 주제가 되었습니다. 매우 다양한 배경들을 지닌 정치 재단들이 이러한 주제를 그들의 의제로 삼고 있습니다.

독일 기본소득 네트워크의 발전은 늘어나는 관심의 한 예입니다.

이 네트워크는 2004년 7월 베를린의 사회과학연구센터에서 창설되었는데, 이 때 동시에 실업수당 개혁에 관한 종합 정책인 ‘하르츠 IV’가 연방상원에서 채택되었습니다. 이런 조우는 매우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정치 계급이 실업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를 증가시키는 법률 꾸러미를 채택하고 있는 동안 시민사회의 몇몇 대표자들은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지지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니까요.

창립 당시에 이 네트워크는 실업자운동, 교회그룹, 과학자와 다양한 정당들의 대표자들 등 매우 다른 배경들을 지닌 약 50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로부터 4년 후인 2008년에는 이 네트워크가 1500명 이상의 회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 네트워크 그룹도 점점 더 많은 도시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독일 네트워크는 특정한 기본소득 모델을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본소득 네트워크를 설립할 때, 창립 회원들은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란 이름을 쓸 가치가 있는 어떤 모델이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다음의 네 가지 기준에 합의했습니다.

1. 생계 보장을 제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특정한 액수를 언급하지 않지만, 대강의 지침은 있습니다. 이는 기본소득이 적어도 사람들이 빈곤 속에서 생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개인별로 수급 자격이 주어져야 합니다.

3. 자산 심사가 전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기본소득을 받기 위해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4. 기본소득에 대한 대가로서 노동 요구가 없습니다!

어떤 범위까지는 약국 체인점 소유주인 성공적 사업가 괴츠 베르너가 점증하는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노동 요구에 반대하는 그의 주장 방식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좌익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역할은 또한 양면적입니다. 제가 이를 언급하는 것은 그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여러분들이 좌익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몇몇 논쟁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한 토크쇼에서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그의 종업원들에게 더 낮은 임금을 지불하기를 바라는지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하기를 바라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물론 더 낮은 임금이죠.”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좌익의 입장에서 보면 사업가가 더 낮은 임금을 지불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이는 매우 우려할만한 것입니다.

사회단체들의 상황

예를 들어, 가톨릭 사용자 운동, 가톨릭 청년단, 녹색당 청년 조직 등과 같이 조직 전체가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몇몇 단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단체들에서는 기본소득이 뜨거운 논쟁의 주제이고 심지어 극단적인 충돌이 있기도 합니다. 동일한 단체 내에서도 기본소득이 우리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하나의 해법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고, 기본소득이 악마보다 더 나쁘다고 확신하는 사람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이러한 아이디어에 반대하는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들이 이 싸움에서 마키아벨리가 그의 책 <군주론>에서 언급했던 조언 모두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심지어 노동조합 내부에서조차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상당수 늘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노동조합 청년 조직과 노동조합 내 실업자를 대표하는 그룹들 안에서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노동조합을 기본소득과 가까워지게 하고 싶다면, 청년 조직들을 접촉하십시오. 그들은 보통 관료들보다 더욱 개방적입니다.

독일 정당들 내부의 상황

80년대에 기본소득을 토론했던 것은 녹색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나서 이 아이디어는 오랫동안 망각되었습니다. 오랜 침묵이 흐른 후 이 주제를 다시 정치의 의제로 올려놓은 것은 새로운 좌파당 당원들의 주요 원천 가운데 하나가 된 예전의 PDS, 민주사회당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논쟁에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PDS 내에서 다수가 그것에 찬성했었는지 아니면 반대했었는지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난 몇 년에 걸쳐 점점 더 많은 녹색당 정치인들이 기본소득 아이디어에 매료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발전은 또한 PDS의 대표자로서 제가 독일 기본소득의 무대에서 이러한 아이디어와 관련을 맺었다는 사실에 의해 고취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정당들 사이의 경쟁이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촉진을 돕는다면 좋은 것입니다. 지금 좌익과 녹색 기본소득 지지자들 사이에는 친밀한 협력이 있습니다.

사회민주당 내에서는 이 아이디어를 주장하는 약간의 지역 지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사회민주당 의원은 찾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저희 의회그룹에는 6명의 확고한 지지자가 있으며 관심 있는 사람들도 몇 명 있고 녹색당 의회그룹에는 10명이나 되는 지지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보입니다. 하지만 독일 의회 내에서 다수가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지지하게끔 만드는 것은 까마득한 일입니다.

좌파당 내부의 상황

저는 좌파당 창당이 일반적으로 좌익의 목표에 부합하는 훌륭한 일이 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노동조합 보수파의 점증하는 영향력 탓에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주장들이 점점 더 거칠어져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창당 강령에서 토론할만한 가치가 있는 이슈로 언급되는 것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창당 강령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 그룹들과 함께 기본소득 이슈를 한층 더 토론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저는 당 대회에서 다수가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을 승인할 수 있을지 어떨지 의문스럽습니다. 그리고 51 퍼센트가 찬성에 투표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49 퍼센트는 그러한 결정을 당을 떠나기 위한 근거로 삼을지도 모릅니다. 요약하자면, 기본소득은 강한 극성을 지닌 주제입니다. 이것은 기본소득 지지자들에게는 꽤 도전적인 상황입니다.

좌파당 내에는 기본소득 아이디어에 전념하는 매우 적극적인 연방연구그룹이 있습니다.

II. 좌익 입장의 한 예로서 연방연구그룹의 기본소득 구상

이제 좌파당 내의 기본소득에 관한 연방연구그룹이 지지하는 기본소득 모델을 소개할까 합니다. 저 또한 개인적으로 이러한 구상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좌파당 전체의 입장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 마지막 단계에서 이 구상은 16살과 그 이상의 모든 사람에게 950 유로의 기본소득을 제공합니다. 이 액수는 빈곤 위험 경계에 기초한 것입니다.

• 기본소득은 액수의 삭감이 없다면 다른 모든 소득원과 합쳐질 수 있습니다.

• 기본소득은 모든 소득원에 대한 35%의 부가세 + 사치품에 대한 세금 + 주요 에너지세로 재원이 마련될 것입니다. 총괄적으로, 인구의 가장 부유한 3분의 1은 기본소득의 도입 탓에 손해를 볼 것이고, 반면 중간층과 인구의 가장 가난한 3분의 1은 기본소득을 도입함으로써 이득을 볼 것입니다.

• 어떤 개인이 기본소득 수급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는 시민권보다는 거주지입니다.

사회적으로 헌신적인 사람들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견지에서 우리는 기본소득의 도입이 다음과 같은 부가적인 조건들과 결합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1. 기본소득은 적어도 시간당 8유로의 통상 최저임금과 결합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임금을 받기를 원합니다. 기본소득은 임금의 대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2. 기본소득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노동의 재분배를 촉진시키기 위해 노동시간의 단축과 결합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기본소득은 성 평등을 위한 보편적인 투쟁 속에 위치해야 합니다. 오늘날 여성은 여전히 사회적 재생산 노동의 보다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사회적 재생산 노동의 50%는 남성이 수행하기를 원합니다. 사회적 재생산 노동은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합니다. 시간의 정치학이라는 주제에 관해 제가 정말 매료되었던 한 이론을 언급해야겠습니다. 좌익 페미니스트인 프리가 하우그가 발전시킨 사위일체의 견해입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일하는 주는 다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1. 노동, 2. 사회적 재생산 노동, 3. 사회적 혹은 정치적 활동, 4. 창조, 사랑 혹은 자신의 능력향상을 위한 시간.

4. 기본소득은 의심의 여지없이, 예를 들어 사회 보조 혹은 대학생 보조와 같은 현존하는 몇몇 사회 수당들을 대체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보험은 부담의 나눔에 있어서 균등과 연대를 위하여 기본소득의 도입 이후에도 남아있어야 합니다. 좌익의 관점에서 볼 때, 기본소득은 연금, 건강, 요양, 실업 보험 체계와 같은 현존하는 사회보험 형태들을 대체/대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지하는 기본소득은 현존하는 사회보험 형태들에 덧붙여지는 것입니다.

5. 장애인처럼 특별한 요구가 있는 사람을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의 특정한 환경을 반영하는 유용한 추가적인 지원 형식을 필요로 합니다.

6. 기본소득을 위한 투쟁은 지구적인 사회적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을 위한 투쟁 속에 위치해야 합니다.

7. 기본소득은 새로운 교육 윤리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현존하는 교육 체계는 여전히 억압과 강제의 방법들을 통해 강력히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 대신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북돋우는 교육 체계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시민사회 내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을 경우에만 의회에서 다수를 획득할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인구의 다수가 설득된다면 우리는 정당들 내의 기회주의 경향에 의존할 수도 있습니다. 시민사회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우리는 기본소득의 장점들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좌익의 입장에서 제가 이루고 싶은 것입니다.

III. 좌익의 정치적 입장에서 기본소득의 장점들

• 정치적 논쟁에서 평등과 자유는 종종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이러한 두 가지 목표를 모아내는 프로젝트입니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을 결핍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입니다. 보조를 요청해야만 하는 것에서 오는 굴욕감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자기결정권을 가져다줍니다.

• 현존하는 사회 수당들은 낙인을 찍는 억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기본소득은 그것과 정반대로 낙인을 찍는 것도 억압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 결과 감춰진 빈곤의 문제 혹은 보다 적절하게 “수치스런 빈곤”으로 표현될 수 있는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 결핍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은 사람들을 그들의 고용주들에 맞서는 보다 나은 협상의 지위에 올려놓습니다. 오늘날 저임금과 심지어 지불되지 않는 추가 노동시간이 종종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실업자가 되는 것은 여전히 빈곤, 배제, 억압의 체제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본소득의 도입은 따라서 고용인들의 지위를 강화시킬 것입니다. 이는 또한 그들의 협상력도 강화시킬 것입니다. 향상된 협상의 지위는 더 높은 임금과 노동시간의 단축을 이끌 수 있고 노동 조건의 민주화 과정 또한 시작할 수 있게 합니다.

• 이미 언급했듯이, 기본소득은 일반적인 노동시간의 단축을 보다 쉽게 해줍니다. 이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능력 향상을 위해 또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보다 많은 시간을 쓰도록 허용합니다.

• 모든 시기에 소득이 제공된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든든함은 연대에 기초한 경제 활동 양식을 북돋우는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은 최소한의 재정 안정 수준을 보장함으로써 사람들을 착취에 덜 취약하도록 해줍니다.

기본소득이 트로이의 목마로 역할하며 내부로부터 자본주의의 붕괴를 불러올까요, 아니면 편안히 자본주의의 틀 속으로 편입될 수 있을까요? 이는 이론이 분분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자본주의에 고유한 “유용성” 논리를 깨뜨린다는 것입니다. 기본소득의 도입이 체제 전환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윤 동기 너머를 내다보는 경제 형태를 위해서는 훨씬 더 나은 조건을 창출할 것입니다.

IV. 점진적으로

저는 우리가 기본소득의 도입을 곧바로 달성할 수 있을지 어떨지 의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다음과 같은 이중 전략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전반적으로 기본소득 아이디어에 대한 옹호를 계속해야 하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 영역에서는 기본소득의 도입을 향하는 구체적인 첫 단계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아마도 아이, 연금생활자 혹은 대학생을 위한 기본소득이 첫 도입 단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 단계는 전액 급여를 받는 안식일의 도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더 나아가면 실업자를 위한 현존 사회수당이 개선되어야 하고, 기본소득의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이는 충분한 조건부 소득 이전을 뜻합니다. 이는 자산 심사를 가능한 한 제한하고 노동 요구 또한 제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방향에서 점진적으로 다수가 이미 기본소득에 근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상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를 위해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은 보다 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꿈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서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옛날 옛적에, 먼 옛날에 사람들이 기본소득이 있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지금은 우리가 기본소득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고대하고 있는 날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원문] Kipping, Katja, “Moving to Basic Income(BI): A left-wing political perspective”, 12th Basic Income Earth Network Congress(Jun 2008).
[번역] 최광은 / 사회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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