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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토] 아감벤,『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지필묵 2010. 3. 7. 11:37



아감벤의『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은혜



1. 예외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은 주권, 호모 사케르, 수용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삶/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고찰하는 저작이다. 아감벤은 이 세 가지 키워드를 모두 ‘예외’라는 역설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그는 주권의 예외화, 삶의 예외화(호모 사케르), 예외적인 공간 확정(수용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외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아감벤의 논의의 배경인 삶정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아감벤은 푸꼬의 삶정치론을 참조하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근대의 이데올로기로서 뿌리내렸던 삶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구분, 즉 생물학적 삶으로서의 조에와 정치적 삶으로서의 비오스라는 구분을 전복하는 것이었다. 푸꼬에 따르면,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정의는 인간이 조에를 가지면서 ‘덤으로’ 비오스를 갖고 있다는 관점을 전제한다. 푸꼬는 조에와 비오스가 별개의 영역이라는 이러한 관점과 달리, 근대적 인간을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36)로 정의함으로써 조에와 비오스가 뒤섞여 구분되지 않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정치, 즉 삶정치를 제시한다.



  주권과 호모 사케르


  아감벤은 주권의 역설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칼 슈미트를 따라 주권의 구조를 예외 구조―주권자가 “법의 외부에 위치하면서 법의 외부란 없다고 선언”하는 구조(56)―로 사고한다. 슈미트에 따르면 “예외란 포섭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일반적인 정식화의 범위를 넘어선다.”(56) 따라서 예외적 주권자는 법질서의 전제가 되는 질서, 즉 정상적인 상황을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포섭될 수 없음’은 일종의 배제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무관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배제시킴으로써만 그것을 포함하는”(61) 극단적인 관계를 의미하며, 아감벤은 이러한 관계를 예외관계라고 부른다. 요컨대 주권은 스스로를 예외상태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즉 규칙(법)의 효력을 정지시킴으로써 규칙(법)이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예외상태야말로 오늘날의 근본적인 정치구조이자 궁극적 규칙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예외상태 속에서 삶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아감벤은 카프카의 우화 『법 앞에서』를 통해 제시한다. 법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법 앞을 떠나지도 못하는 시골 사람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문지기에 가로 막혀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는 법으로부터 배제되었지만, 법의 문이 그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는 법에 포함되어있다. 여기서 아감벤은 법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비식별역을 주권의 장으로, 그리고 이 비식별역을 결정하는 존재를 주권자로 규정한다. 이처럼 “법이 삶을 참조하며 또 삶을 보류함으로써 삶을 자기 내부에 포함시키는 본래적인 구조”(79)가 바로 주권의 구조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주권은 자신의 존재기반인 삶에게 추방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것이 법 바깥으로 쫓겨나 법과 무관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삶은 추방(배제)되지만, 추방령 속에 포함된 채로 남아있다. 따라서 추방령이란 관계없는 것과의 관계설정, 즉 예외상태로의 유배이다.

  아감벤은 추방령의 대상으로서의 삶을 호모 사케르에서 찾는다. 이것은 벤야민에게서 빌려온 벌거벗은 삶(nuda vita, bare life)[각주:1]이라는 개념과도 일치한다. 호모 사케르의 추방은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156)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신의 법과 인간의 법 모두와 예외관계를 맺는데, 양자와 무관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즉 양자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배제된다. 다시 말해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음의 형태로 신에게 바쳐지며 또한 죽여도 괜찮다는 형태로 공동체에 포함”(175)되는 것이다.

  죽여도 되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호모 사케르는 “성과 속, 종교적인 것과 법적인 것 사이의 구분 이전의 영역에 위치한 어떤 근원적인 정치적 구조”를 보여주는 단서와도 같다. 그러나 그것이 단서일 수 있는 것은 신성함이 갖는 본래적인 양가성[각주:2] 때문이 아니라, 호모 사케르가 처한 비식별역이 곧 “신성한 제의의 장도 세속적 행위의 장도 아닌 새로운 인간 행위의 장”(176)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감벤은 신의 법(희생 제의)과 인간의 법(형벌) 모두를 초월한 호모 사케르에게서 정치의 근원을 찾고 있다. 그리고 삶의 신성화를 정치의 근원으로 정초함으로써, 그는 그동안 인권의 차원에서 소박하게 그러나 초월적으로 다루어졌던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담론에 내재적인 삶정치적 지평을 열어준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의 삶정치적 성격이 드러나는 예로 생사여탈권을 드는데, 여기서 생(生)은 사(死)에 의해 위협 받는다. 이처럼 정치는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삶(벌거벗은 삶, 호모 사케르)을 전제한다. 벌거벗은 삶은 생사여탈권 하에서 법적·정치적 질서로 포섭되지만, 반대로 “죽음의 가능성 그 자체를 통해 정치화되는 생명”(186)이 정치를 정초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정치적 지평에서 벌거벗은 삶(추방령의 대상)과 정치적 신체(추방령의 결정권자)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의 또 다른 형상으로 인간인 동시에 짐승인 늑대인간을 제시한다. 흥미롭게도 그는 늑대인간을 통해, 추방당한 자의 원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홉스의 자연상태(‘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를 새롭게 조명한다. 이로써 홉스의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에게 벌거벗은 삶인 상태’로 재정의된다. 이 책의 제사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홉스는 “국가가 분해된 것은 아니지만 마치 분해된 상태인 것처럼 간주”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홉스가 리바이어던이라는 정치적 신체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근거인 자연상태는 국가 이전에 실재했던 무질서가 아니라 국가(법적·정치적 질서의 공간)를 창출하기 위한 질서의 정지, 즉 예외상태이다. 

  처벌권에 대한 언급에서 홉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주권의 토대는 “신민들이 그 권리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 그 자신의 처벌권을 행사하도록” 주권자를 강화한 것에 있다.(217) 다시 말해 그것은 계약을 통한 자발적인 자연권 양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외상태를 통한 주권자의 자연권 보존에 있는 것이다. 이제 정치권력은 자유의지에 기반한 사회계약의 산물이 아니라 추방령, 즉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삶의 결합의 산물이다. “추방령이란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자신에게 인도하도록 만드는 권한, 즉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미리 전제된 어떤 것과의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힘”이며, “추방된 자는 자신의 분리된 상태 그 자체로 넘겨지는 동시에 자신을 내버린 자의 자비에 위탁된다.”(223) 이러한 추방령의 구조는 예외적인 공간 확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삶의 정치화 : 난민과 수용소

 

  아감벤은 예외적인 공간 확정, 즉 ‘예외상태의 물질화’로서 수용소를 제시한다. 수용소는 전시상황이라는 예외상태를 근거로 (근대적 삶정치의 기초인) 신체의 자유를 유보시키는 공간이다. 수용소로의 추방은 언제나 격리-수용(隔離-收容), 즉 배제인 동시에 포함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용소는 삶이 정치적 지위를 박탈당하는(배제) 동시에 주권과 어떠한 매개도 없이 대면하는(포함) 예외적 공간이다. 따라서 그것은 전체주의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주권체제의 공간이기 전에, 삶정치의 공간이다.

  정치의 삶정치로의 이행이 ‘삶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 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자유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공히 벌거벗은 삶을 긍정한다. 다만 전자는 신체(개인)의 자유와 그것에 기반한 사적인 것을 보호함으로써 긍정하고, 후자는 신체 자체를 주권적 결정의 장소로 삼음으로써 긍정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신체(의 자유)에 대한 긍정에서 삶정치로의 이행의 징후를 찾는데, 그는 절대주의와의 투쟁의 산물인 ‘인신보호영장’을 그 예로 든다. 그것은 ‘신병확보’와 ‘신체의 자유’를 동시에 정초함으로써 신체의 양가성을 드러낸다. 이로써 근대의 신체는 “주권권력에 대한 예속의 대상이자 개인적 자유의 담지자”가 된다.(245) 아감벤이 주목하고 있듯이, 유럽의 민주주의가 절대주의에 맞서 인간(비오스)이 아닌 신체(조에)를 내세운 것은 곧 벌거벗은 삶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정치 담론, 특히 인권과 국가의 관계에서 출생이 갖는 중요성과 직결된다. 아감벤은 인권선언문을 메타-법률로 삼는 관습적인 독해 대신 그것이 국민국가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기능하는 측면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특히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권리를 보장받는 존재에서 권리를 보전하기 위해 정치적 결사를 행하는 인간으로, 그리고 주권의 원천인 국민으로 변형된다.[각주:3] 즉 인권선언은 왕권신수에서 국민주권으로의 이행에 대한 선언이며, 이때 인권은 출생에서 출발하지만 그 즉시 국민이 되는 예외적 존재―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시킬 수는 없는 벌거벗은 삶―에게만 주어진다. 즉 인권의 존재방식은 예외이자 소여이며, 그 예외와 소여를 결정하는 것은 주권이다.

  주권의 결정은 역사적으로 ‘시민권’에서 두드러졌는데, 우리는 누가 시민이고 누가 시민이 아닌지를 규정하는 것에 대한 주권의 집착으로부터 벌거벗은 삶이 주권의 기초로서 자리한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권에 대한 집착은 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모두 공유하고 있으며, 전체주의는 그것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전체주의를 독해하면서 방점을 찍어야 할 지점은 그것의 유례없는 잔학무도함이 아니라, 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근대 정치체제의 양극단이 갖는 공통분모, 즉 벌거벗은 삶이 주권의 기초가 되는 삶정치적 맥락이다.       

  그러나 출생이 곧 국민으로 기입됨(‘출생신고’를 떠올려보라!)을 의미하는 오늘날, 양자는 서로 너무나 밀착되어있어서 그로부터 벌거벗은 삶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아감벤은 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허구를 폭로하는 것으로서 난민과 수용소를 제시한다. 난민과 수용소는 출생과 국민국가 사이의 간격을 드러낸다. 난민은 한편으로는 추방당하고(국적 박탈) 다른 한편으로는 보호받는(인권 보호) 오늘날의 호모 사케르이며, 수용소는 호모 사케르가 처한 예외상태의 물질화이다. 국적 박탈이 ‘국민으로서의 삶’을 거세하여 벌거벗은 삶을 창출하려는 시도라면, 인권 보호는 그 벌거벗은 삶을 다시금 포섭하려는 시도이다. 인도주의는 삶을 신성화함으로써―죽여도 좋은 상황은 문제 삼지 않은 채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만을 반복함으로써―삶을 보호의 대상으로 만든다. 인도주의는 야훼가 카인에게 붙여준 표[각주:4]처럼, 삶의 격리-수용을 극복하기는커녕 끝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죽음의 정치화 : 안락사, VP, 심층코마/뇌사


  출생과 국민의 즉각적인 연결을 통해 유지되는 국가는 당연하게도 ‘건강’에 주목하게 된다. “이제 정치의 유일한 진정한 문제는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보살핌, 통제, 향유를 보장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정치조직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일 뿐”(240)이다. 아감벤은 우생학에 대한 논의를 (광기나 잔혹함으로부터가 아니라) 삶에 대한 국가의 배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삶을 “살아 있는 부”(278)로 간주하는 것으로, 이때부터 의학이 주권의 영역으로 통합되고 정치가 ‘경찰’로 나타난다.[각주:5] 정치가 경찰이 된다는 것, 즉 주권이 삶을 보살피는 데 복무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삶정치적 현상이다. 이러한 보살핌은 삶에 대한 개입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개입은 ‘삶의 정지’에 대한 결정으로까지 나아간다. 삶정치의 극단에 죽음정치(tanatopolitica)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감벤은 안락사 환자, 생체실험 대상(VP, 인간 모르모트), 심층코마/뇌사 환자를 통해 죽음의 정치화를 조명한다. 안락사는 삶의 가치에 대한 결정권과 관련된 것으로 그에 관한 법규는 면책살해를 보장하는 법규와도 같다.[각주:6] 생체실험은 주로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삶이 공동체에 기여하는(포함되는) 방식으로 죽음(최종적 배제)을 맞는 무대이다. 그리고 심층코마와 뇌사라는 개념은 삶과 죽음의 비식별역을 창출함으로써 사망시각에 대한 결정을 재정립한다.

  이러한 죽음정치의 사례들에서 모든 삶은 호모 사케르의 극단적인 형태를 구현한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고유한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개념, 즉 그 자체로서는 오로지 결정을 통해서만 정확한 의미를 얻게 되는 정치적 개념”(312)이 된다. 따라서 “벌거벗은 생명은 더 이상 특정한 장소나 특수한 범주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생물학적 신체 속에 깃들어 있다.”(26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치의 삶정치화―삶/죽음에 대한 결정이 가장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것―와 권력의 삶권력화―유일한 결정권자인 주권이 “법률가뿐만 아니라 의사, 과학자, 전문가, 사제와 점점 더 밀접한 공생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241)―이다.   



2. 문턱


  아감벤은 이러한 예외들을 연구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잠정적 결론을 도출한다. 첫째, “근원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령이다.” 이것은 사회계약론과 귀속 관념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둘째, “주권권력의 근본적인 행위는 … 벌거벗은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과 문화, 조에와 비오스가 결합된) 비식별역으로서의 삶/생명을 정치의 근원으로 삼음으로써, 시민권이 정치적 자유의 기초라는 관념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셋째, “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 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이다.” 이것은 공적 공간을 사유하고 조직함에 있어 벌거벗은 삶이 갖는 중요성을 주장한다.(341-342)

  이처럼 아감벤의 예외들이 갖는 정치적 함의는 오늘날의 정치가 삶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삶을 끊임없이 예외화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아감벤은 근대의 정치를 탈근대적으로 사유하는 이론적 이행에 있어서 벌거벗은 삶을 일종의 문턱(threshold)으로 사고한다. 그것은 주권과 삶의 근대적 관계를 자유의지에 따른 계약(민주주의)이나 광기와 비참(전체주의)으로 설명하는 근대의 이데올로기들을 논파한다. 그러나 벌거벗은 삶은 ‘정치의 근원’이라는 존재론적 자리매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력하다. 거기에는 추방만 있을 뿐 해방은 없다. 이 순간 문턱은 넘어섬의 계기가 아니라 주저앉음의 계기가 된다.



  


  아감벤은 삶정치와 몸의 정치를 적극적으로 펼친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탈근대 정치이론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급진성은 벌거벗은 삶이 “정치권력에 대한 우리의 예속을 표현”(343)하는 것에 머무는 순간 약화된다. 정치권력이 그러한 예속에 의존하고 있다하더라도, 그래서 존재론적 근원성을 가진다하더라도 새로운 삶의 구성과 생산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 그것은 무력하다. 그렇다면 아감벤에게 삶과 몸은, 아니 비타(vita)와 코르푸스(corpus)는 도대체 무엇인가. 

  비타와 코르푸스로 음역한 이유는 그것을 번역할 때 생기는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어려움은 기술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아감벤의 삶정치 개념이 갖는 특유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실제로 아감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비타와 코르푸스가 생명과 생명체로 번역됐을 때 더 자연스럽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 그의 삶 개념은 조에적 측면이 압도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는 푸꼬를 따라 근대적 삶을 조에와 비오스의 비식별로 설명하지만, 그가 그리는 주체의 형상은 무언가를 구성하고 생산하는 질적인 삶이라기보다는 생사(여탈)의 기로에 놓여있는 생명 혹은 생명체이다. (이것은 죽음정치에 대한 논의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감벤은 정치철학의 신체의 유비를 벌거벗은 삶과 밀접한 것으로 파악하는데, 이는 리바이어던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리바이어던을 “주체들의 신체가 살해당할 수 있는 절대적 가능성”으로 형성된 정치적 신체로 간주한다.[각주:7](246) 여기서 개개의 신체가 탈주할 가능성, 그리하여 리바이어던을 붕괴시키고 전혀 새로운 몸을 구성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삶정치의 물질화로 수용소―더 나아가 생체실험실, 소생실과 같은 죽음정치의 공간―가 제시된 것 또한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분석은 (마치 아감벤이 감금에 대한 푸코의 연구가 수용소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듯이) 왜 저항의 장소나 생산의 장소를 연구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아감벤이 보이는 조에와 죽음정치에 대한 편향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감벤의 삶정치 개념을 재검토해야 한다. 그가 주권과 관계 맺는 삶으로 제시한 벌거벗은 삶은 구성적 삶이 아닌 비-죽음으로서의 삶, 그야말로 삶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삶이다. 아감벤의 삶 개념이 구성 혹은 힘의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조에와 비오스의 비식별이 언제든지 분리 가능한 정도로만 식별되지 않을 뿐임을 의미한다. 삶정치를 주권으로의 예속이 아니라 주권과의 투쟁으로 사고한다면, 그리고 나아가 새로운 삶의 구성으로 사고한다면, 그가 인용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 대한 푸꼬의 비판은 그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삶의 힘, 혹은 힘으로서의 삶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아감벤은 ‘힘’을 벌거벗은 삶에서가 아니라 주권의 영역에서 다룬다. 주권의 영역에서 힘의 문제는 제헌권력과 제정된 권력의 관계로 나타난다.

  아감벤은 슈미트와 네그리를 비교하면서 제헌권력과 주권권력의 관계를 논한다. 슈미트는 제헌권력을 “고유한 정치적 실존 양상과 형식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 전체에 부합하는 일종의 정치적 의지”로 사고하며, 그것이 “모든 헌법 제정 이전에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여”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제헌권력이 헌법 제정에 선행하는 인민의 제헌의지와 동일시되는 것은 제헌권력과 주권권력의 교착(인민주권)을 의미하며, 그것은 그에게 문제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권을 갖거나 제헌적 권력의 주체나 담지자가 되지는 않”는 헌법기관을 출현시킴으로써 그러한 교착을 막으려 한다. 반면 제헌권력을 “자유 속에서 갱신되며 일련의 자유로운 ‘실천’을 통해 조직되는 어떤 구성적 행위의 ‘실천’”으로 사고하는 네그리는 제헌권력의 환원불가능성에 주목한다. 제헌권력이 주권권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이 “제헌권력의 확정”으로, “그것이 담지한 자유의 고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106-107)

  아감벤은 네그리의 제헌권력론으로부터 정치의 존재론적 위상을 발견한다. 제헌권력이 환원불가능하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정치권력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론적인 힘(potenza, potentiality)의 구성에 관한 문제임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제헌권력과 제정된 권력의 관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potentiality, dynamis)과 현실성(actuality, energeia)의 관계로 옮겨놓는다. 이러한 구도에서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잠재성의 존재양식과 자율성이다. 그는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잠재성(im-potentiality, adynamia), 즉 ‘~이지/하지 않을 잠재성’에서 찾는데, 잠재성이 비잠재성이 될 때 그것은 현실성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아감벤은 현실성에 대한 잠재성의 자율성, 즉 현실화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을 “자체의 지양”(111)이라고 표현한다. 이로써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는 ‘~일/할 잠재성의 현실화’가 아니라, ‘~이지/하지 않을 잠재성의 유보’가 된다.

  이러한 사유는 ‘현실화되지 않은 것은 곧 존재하지 않는 것’(현실성에 대한 종속)이라는 관념과의 투쟁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그러한 관념은 경계되어야 하고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성을 잠재성의 완성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과 잠재성을 현실화되지 않을 (비)잠재성으로 사고하는 것 사이의 논리적 연관은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아감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잠재성의 완성을 부정하고 (비)잠재성의 유보를 긍정하는 것은, “잠재성이 실현됨으로써 매번 즉각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지속성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111) 그런 의미에서 유보는 곧 보존하는 동시에 제거하는 것(지양)이다. 이처럼 잠재성이 ‘현실화되면 사라지는 것’, 그래서 ‘보존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고되는 한, 그 잠재성 혹은 존재론적 힘(potenza)은 벌거벗은 삶이 그러하듯 구성의 관점을 결여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감벤이 잠재성으로부터 활력/구성력이 아닌 주권을 읽어내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비)잠재성과 현실성이 맺는 관계, 즉 ‘않을 잠재성’이 ‘자체의 지양’을 통해 현실화되는 구조는 “자신을 [예외에] 적용시키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예외에 적용시키는 주권의 구조에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13) 예외란 없다고 선포함으로써 자신을 예외화하는 주권은, 더 이상 잠재성과 현실성을 구분할 수 없는 비식별역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권적 비식별역은 아포리아로 남게 된다.



  그러나 아감벤의 사유가 아포리아의 발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호모 사케르』의 말미에 “비오스가 오로지 자신의 조에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러한 삶을 ‘삶-의-형태’(forma-di-vita)로 명명한다. 그것은 “그 형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삶”, “살아가는 와중에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역량의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감벤은 더 나아가 사회적 역량으로서의 일반지성과 그것의 물티투도적 성격까지 포착하고 있다.[각주:8] 『호모 사케르』가 준 아포리아의 놀라움이 어떤 구성적 기획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해방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채워나가는 것은 아감벤에게나 우리에게나 동일한 과제로 남겨져있다.   



  1. 『호모 사케르』 한국어판에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번역되어 있다. bloße/nuda/bare는 ‘탈(脫)’이라는 어감을 갖는 ‘벌거벗은’이 아니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어판 역자도 지적하고 있다. 38쪽 역주 3번 참조.) 이 글에서는 이미 정착된 ‘벌거벗은’이라는 역어를 취하되, 생물학적인 상을 떠올리게 하는 ‘생명’ 대신 질적인 차원을 포괄하는 ‘삶’을 취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2. 신성함(sacer)이라는 단어는 ‘성스러운’(경외, 순수)이라는 뜻과 ‘저주받은’(혐오, 오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2부 2장 2절 참조. [본문으로]
  3. “제 1 조,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 제 2 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권리를 보전함에 있다. 그 권리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의 저항 등이다. 제 3 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떠한 단체나 어떠한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유래하지 않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본문으로]
  4.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 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 주마.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야훼께서는 누가 카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주셨다. (창세기 4장 14-15절, 공동번역) [본문으로]
  5. 아감벤은 폰 유스티를 따라 정치와 경찰을 구분한다. 정치는 적들에 대한 투쟁인 반면, 경찰은 시민들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다. 아감벤은 국가사회주의의 우생학에서 정치와 경찰의 차이가 사라진다고 말한다.(281-282) [본문으로]
  6. 형법 전문가 빈딩은 안락사에 대한 최종결정권이 “의사, 정신과의사, 판사로 구성된 국가위원회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환자 본인과 가족은 ‘요구’의 권한만을 가진다.(268) [본문으로]
  7. 홉스는 인간이 ‘서로에게 동일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사람을 죽이는 일’로부터 인간의 본래적 평등을 논하는데, 아감벤은 이 부분을 인용하여 리바이어던을 벌거벗은 삶으로 재해석한다. [본문으로]
  8. 『목적 없는 수단』 제1부 제1장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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