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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26 [발췌]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민음사)

[발췌]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민음사)

리토르넬로 2010. 10. 26. 00:41

(12) 
아니다! 그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풍경들은 정확하게 똑같은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같게 느껴진다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예상 못 했고, 몰랐으며, 게다가 이해도, 생각조차도 못했다는 걸 의미한다.

(16)
마부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는 똑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건 똑같은 게 아니라는 의미 아닌가.

(26)
진정과 위안이 번져 나갔다. 이곳, 돌로 지은 교회 안에서 농부는 다시 농부가, 지주는 다시 지주가, 미사는 다시 미사가, 돌은 다시 돌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30)
그것은 끝없는 성운 어느 한 귀퉁이에서 일어나는 색다른 공연, 어둠 속에서 괴상한 몸짓과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나부대는 인간들의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우리 존재는 이렇게 무한한 공간에 잠김으로써 뜻밖에도 어떤 구체성을, 생생한 현실감을 얻고 있었다. 인간은 이 우주에 돌이킬 수 없이 던져져서 샅샅이 규명된 어떤 것이었다.

(31)
절대적 어둠 속에 홀로 버티고 있을 때 난데없이 솟아오른 이 관능. 불현듯 기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만약 이 있다면 그건 하늘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닌 바로 이런 기적이겠구나 싶었다.

(33)
그녀의 등과 뒷목의 선은 여전히 소녀의 것이었다. 내 눈은 그녀의 목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그녀의 목이 조금 전에 보았던 또 다른 목과 아주 자연스럽게 만나는 게 보였다. 그녀의 목과 또 다른 목이 내 눈앞에 나란히 있었다. 그렇다. 두 개의 목. 이 둘은…….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녀의 (소녀다운) 목이 마치 그것만 몸에서 빠져나와 조금 전에 본 그 (소년의) 목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하나는 끌려가고 다른 하나는 끌어당기는 것처럼. 

(91)
'아직 어린', 너무 가벼운, 무게를 지니지 못한, 그래서 그 부족함과 미완성을 통해 원천적인 힘을 행사하는 이 소년과 함께……. 

(99) 
조금 전 우리가 목격했던 일. 꿈틀거리던 지렁이의 몸통을 번갈아 짓이기던 그 두 개의 천진한 다리. 둘은 잔인한 공범자였다. 그런데 잔인하다고? 그것은 정말 잔인한 일이었던가? 차라리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편이 옳지 않을까. 사람들이 길을 걸어갈 때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거기 있기 때문에 지렁이를 밟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날마다 얼마나 많은 지렁이를 밟아 으깨는가! 그렇다, 그 둘의 행동은 잔인한 것이 아니라 분별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죽음의 고통을 호기심에 찬 어린아이의 눈으로, 재미있다는 듯, 아무런 가책 없이 응시하고 있었을 뿐.

(100)
우주 공간이 하나이듯 고통도 '하나'다. 고통이란 작은 조각으로 분할할 수 없다.

(102)
'죄악'이라는 이 짧은 단어가 숨기고 있는 희망, 가능성이란 경이로운 것이었다.
한 개인이 마음속으로 은밀히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악은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존재 속으로 깊숙이, 마치 사랑의 행위를 할 때 육체를 통해 상대방의 몸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만큼이나 깊숙이 파고들게 해준다고.

(107)
'사실은'이라니. 얼마나 멋진 단어인가! 이 단어만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말할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말하게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흐릿하게 지워버리는 이 마술의 단어. 

(111)
'예쁜'……. 가슴 쓰리게도 '예쁜' 그 모습. 그 두 사람은 '예뻤다.'

(118)
내가 생각하기에 그때 그녀의 심리 상태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안목 있는 비평가에게 선보일 기회를 잡은 시골 화가와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이란 그녀 자신, 그녀의 삶이 아닌가.

(119)
… 그는 자신이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는 걸 확인하고 했다. 예를 들면 쥐었다가 폈다가 끊임없이 비틀고 꼼지락거리던의 손. 나는 그의 손이 지극히 손다워지는 것을, 손 아닌 모든 것을 차츰 지워버리고 오직 손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보았다.

(129)
이렇게 서서히, 얼마간 이야기가 이어진 다음, 그가 말하고 있는 것 뒤편에서 그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말 없는, 말을 벗어난 진짜 말. 단어들로는 옮길 수 없는 어떤 의미가 실린 그것.

(133)
이 무슨 역설인지! 모두가 그녀 단 한 사람의 어떤 행동을 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는, 그럴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모여 있는 이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움직임이 허용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135)
그건 사랑이 아니라, 보다 개인적인 차원의 어떤 감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인정과 확인을 그리스도에게 갈구한 것이 아니라, 그저 명민한 의식의 소유자일 뿐 한 인간에 불과한 프레데릭에게서 얻어내려 함으로써 사상의 어떤 놀랄 만한 이단성을 노출했다.

(169)
내게 있어 민족과 그것에 따라붙는 일체의 것들, 낭만주의의 이 부산물들은 결코 마실 수 없는, 날 괴롭히기 위해 조제된 혼합 음료였다.

(170)
대독 저항운동, 전투적……. 이런 단어들이 별안간 매일의 삶보다 훨씬 생생한 진실을 띠고 다가와서 신선한 바람처럼 실내를 한 바퀴 휘감아 돌았다. 

(201)
설마 내가 말하는 게 저 낡은 하느님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바로 자연이라는 오래된 원리 말입니다. 자연이 지금처럼 무언가 예기치 못한 걸 가지고 우리의 옆구리를 치면, 거기에 저항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굽혀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하는 걸 내심 포기해서는 안 되지요. 특히 필요한 건 그걸 끝끝내 응시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래야 자연도 알 게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우리의 목표'가 있다는 사실을. 자연은 처음 우리에게 참견할 때는 늘 분명하고 단호해 보이지만, 얼마 지나면 마치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린 듯 감시가 느슨해지곤 하지요. 그때가 되면 우리는 자연의 어떤 너그러움을 기대하면서 은근슬쩍 우리 자신의 일로 되돌아오면 됩니다…….

(202) 
그는 나를 향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힘들과 지칠 줄 모르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259)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살인자가 되었을 때 헤니아가 자신을 혐오하게 될 거라고 걱정했듯이, 이제 살인자가 된 카롤은 그녀에게 끔찍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리라고. 그러나 이건 그가 꽃에 코를 갖다 대고 향기를 음미하는 대신 영혼을 킁킁거리기만 하는 데서 비롯된 착각이었다. 그는 죄악이 추하고 미덕은 아름답다는 말을 과신하고 있었다. 이 범죄가 카롤의 육체를 빌려 행해질 경우 어떤 심미적인 향취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건 자신이 그 일을 저질렀을 때의 맛과는 다를 거라는 사실을 그는 잊고 있었다.

(280)
단지 어머니이기만 한, 어머니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이 시효 지난 존재는 마찬가지로 시효 지난 과거에 잠겨 허우적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머니에 대한 경건한 숭배에 취해 멀어져 갔다. 나는 그녀가 우리 일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무엇이기 이전에 우선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녀가 현재 해낼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동안 그녀의 낡은 젖가슴이 춤을 추었다.

(281)
성숙한 인간은 자신이 타인의 마음에 드는지, 자신이 호감을 주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할 뿐이다. 자신이 즐거움을 느끼는가 여부에 따라 어떤 것이 아름답고 어떤 것이 추한지가 결정된다. 

(291)
젊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한한 쾌감이 번져왔다. 왜 아니겠는가? 그들이 떼어놓는 발걸음 아래서 끔찍한 성격의 한 행위가 다른 눈부신, 생기를 불어넣는 어떤 행위로 바뀌고 있는데……. 다만 한 가지 마응에 걸리는 점은, 살금살금 발끝을 세워 다가오고 있는 이 젊음의 종류였다. 이 젊음은 과연 순수한 것인가? 이것은 정말로 신선하고 단순하며 자연스러운, 순진한 젊음인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른들을 위한' 젊음이었다. 문밖의 저 소년과 소녀가 이 모험에 가담한 것은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였다. 고분고분한 태도로, 우리의 환심을 사고, 우리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리고 그 젊음을 '향해 뻗어 나간' 나의 성숙은 성숙을 '향해 내밀어진' 그들의 젊음과 시에미안의 몸뚱이 위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다.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 만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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