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 <21세기 스파르타쿠스> 세미나 후기

NUDA POTENZA 2009. 11. 8. 03:48

이번주엔 <21세기 스파르타쿠스> 마지막 부인 '사빠띠스따'를 읽고 이야기 나눴어요.
메모를 제대로 안 했는데 요한님이 후기 쓰라고 시켜서 (복수를 하다니 ㅡ.ㅡ+) 생각나는 것만 적어봤어요.
그러니 아무래도 제가 했던 얘기 위주겠지요? 제가 좀 그래요. 전 소중하니까요. ㅎ
암튼 다음주부터는 새사연에서 나온 연속 기사를 읽습니다. ('공부도 실천이다' 게시판 참조)
책이 아니라 기사니까 부담갖지 말고 함께 해요~ ^ㅁ^



* 사빠띠스따와 투표


“마르꼬스가 제안한 민주적 공간에서 투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사회 집단으로부터 하나의 제안이 이루어지면 그 제안에 대한 제안자의 충분한 설명이 있고 그 제안이 모든 개인, 모든 집단에 미칠 영향에 대한 분석이 뒤따르며 찬성안과 반대한 사이의 논쟁이 전개된다. 투표는 이 분석과 논쟁을 통해 모든 사람이 투표해도 좋다는 데 동의하기 전에는 실시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투표는 어떤 찬반에 대한 동의 여부만을 묻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하나의 집단적 축제이면서 학습과 훈련을 쌓는 조직화의 과정으로 정의된다. 마르꼬스는 이것을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183~184쪽)


- 사빠띠스따의 의사결정과정의 최종단계는 투표이다. 그러나 그들의 투표는 지루할 정도로 신중한 토론과정을 전제로 한다. 그들에게 다수결은 토론과 숙고의 결과물로 출현하는 것이지 ‘원칙’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투표는 권리를 양도할 대리인을 선출하기(한국을 비롯한 소위 ‘근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용되는 의미의 투표, 즉 선거)위한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그 권리를 ‘직접' 행사하기 위한 것이다.

 

- 한국에서 사빠띠스따와 똑같은 수준의 투표를 실험하는 것은 당장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재의 자유로운 대의제(선출된 후에 자기 마음대로 하는 -.-)를 구속된 대의제(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에게 철저하게 구속되는 ^-^)로 변화시키는 것은 당장 시도할 수 있다.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제도적인 개혁으로 주민(국민)소환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선거의 판을 선출할 사람들이 직접 짜는(이제까지는 선출‘될’ 사람들이 만들어왔다!) 것이다. 가령 입후보과정부터 해당 지역구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후보를 내서 선거운동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입후보 단계부터 선출할 사람들이 주도권을 갖고 철저한 검증과 토론을 거치는 것이다. 이번 재보선의 후보단일화 운동은 이러한 실험의 첫걸음으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을 계속 하다보면 ‘주민공천제’와 같은 이름으로 법제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더 많은 대의를 요구하며 대의를 넘어서기.  



* 전복적 친연성


“사빠띠스따의 민족 개념의 또 하나의 차원은 전복적 친연관계(subversive affinity)에 있다 ... 사빠띠스따들이 말하는 민족은 단순한 국경이나 인종적 특징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말하듯이 ‘500년 간에 걸친 투쟁의 산물’이다. 그것은 노예제, 스페인 식민주의, 북미 제국주의, 뽀르피리오디아스의 독재에 대항한 민중들의 반란의 역사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지배적 형태로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범인류적 투쟁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차원을 획득해 나가고 있다. ... 사빠띠스따들은 새로운 민족, 전복적 민족의 구축이라는 실험을 통해 민족의 이익과 인류(humanity)의 이익을 일치시켜 나가려고 시도하고 있다.” (185~186쪽)


- 전복적 친연관계란, 우리가 연대의 조건으로서 친밀함을 말할 때 떠올리는 근대적 통념을 뒤엎는 전혀 새로운 친밀함을 가리킨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국적, 인종, 종족, 성별, 언어, 문화 등으로 구획되는 친밀함이 아니라, 투쟁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친밀함이다. (사실 이것을 가장 잘 ‘느끼고 맛보는’ 사람들이 우리다!)

 

- 그렇기에 사빠띠스따는 “차이를 인간적 소통의 기본적 조건으로”(209쪽) 본다. 여기서 소통은 단순히 연대의 도구가 아니라, 연대와 민주주의를 구축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실제로 사빠띠스따는 의사결정과정에 치아빠스에 적을 두지 않고 있는 외국인 활동가들까지 포함시켰다. 그리고 96년과 97년에 대륙간회의를 열어 전세계의 풀뿌리 활동가들을 초청했다. 이것은 단지 국제사회의 관심을 얻어 멕시코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국적, 인종, 성별, 언어, 문화를 가진 사람들, 온갖 OO주의자들이 서로 접속하여 투쟁의 네트워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 따라서 사빠띠스따에게 ‘민족(Nation)’은 마야 원주민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민족은 전 인류이며 투쟁의 네트워크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엄과 사랑,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촛불은 사빠띠스따와 한 민족이다!) 그러므로 사빠띠스따가 국가권력 장악에 반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양보되거나 포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과는 전혀 다른 권력관계, 전혀 다른 정치의 출현을 의미한다.

 

- “혁명을 도달해야 할 어떤 목표 혹은 상태로 보지 않으며, ...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는 끊임없는 운동으로 사고”(249쪽)하기. 물으면서 걸어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