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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19 학생에게 임금을! : 학문후속세대에서 수업노동자로
  2. 2010.08.10 Michael Hardt, "Politics of the Common" 노트 4
  3. 2010.06.01 마틴 루터 킹, "우리가 기다릴 수 없는 이유" 5
  4. 2010.04.25 [번역] Manifesto: occupation at the University of Puerto Rico (korean translation) 4
  5. 2010.04.20 <Commonwealth> 3.1.3 "삶정치적 생산과 통제의 위기" 논의의 틀
  6. 2010.04.12 [번역] NO! G8 Action 리플렛
  7. 2010.03.07 [발/토] 아감벤,『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8. 2010.02.05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전복에 관한 테제 2
  9. 2010.01.26 [UBI 세미나]『VOL』2호 좌담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중 일부 번역 1
  10. 2010.01.16 [UBI 세미나] 곽노완,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

학생에게 임금을! : 학문후속세대에서 수업노동자로

지필묵 2011. 5. 19. 01:17

* 2008년 중앙대 사회학과 집담회를 위해 쓴 짤막한 글이다.
* 그때 나는 대학원수료생이었고, 지금 나는 논문제출기한을 넘겼는지 넘기기 직전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학생에게 임금을! : 학문후속세대에서 수업노동자로

 



  나는 1983년에 태어나 1999년에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다 1년 후 자퇴를 했고 2003년 또래보다 1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좌파적 감수성을 유지하면서 학부시절을 보냈고, 졸업 직후 극우파들이 ‘빨갱이사관학교’라고 치켜세워주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2006년 4월에 소위 연구조교 생활을 시작했고, 그 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2년 동안 학진의 녹을 먹었다. 그 사이에 영어시험과 종합시험과 프로포절 심사를 거쳤고, ‘준비중’이라는 대답만 1년 가까이 하면서 논문을 미뤄오다 요즘 겨우 마음을 잡았다. 2008년 11월 현재 나의 상태는 석사수료생. 예치금을 내야 책을 빌릴 수 있고, 늦어지는 논문 때문에 지도교수를 피하게 되고, ‘논문은 어떻게 돼 가냐’라는 질문과 ‘졸업하고 어떻게 할 생각이냐’라는 질문을 동시에 받는, 그러면서도 그것에 조금씩 무뎌져가는 대학원수료생이다. 이상이 ‘학문후속세대’로서의 나의 연대기이다.  

  그러나 모든 연대기에는 외전이 있는 법. 나는 대학원생으로 살아온 시간동안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시 논문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내가 남발했던 ‘준비중’이라는 대답은 사실 대부분 면피용이었다. 나는 프로포절 통과 후 논문을 쓰고도 남았을 1년이라는 시간동안 ‘딴 짓’을 하고 있었다. 논문의 참고문헌과 한참 동떨어진 『앙띠 외디푸스』를 강독했고, 영어가 아닌 에스페란토와 라틴어를 공부했다. 또 죽었다 깨어나도 등재지가 될 수 없는(그리고 될 필요도 의지도 없는) 「자율평론」[각주:1]을 편집했고, 대항대학을 표방하는 <다중지성의 정원>[각주:2]을 함께 만들어 학생이자 강사이자 만사(만드는 사람)로 활동했다. 이처럼 나는 소위 제도권과 비제도권이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을 동시에 경험했던 것이다.

  여기서 제도권과 비제도권이라는 구분을 사용하는 것은 양자를 경쟁시켜서 택일을 종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날 그 사이를 횡단하고 있는 학문후속세대의 처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실제로 제도권에 적을 두고 있는 많은 학문후속세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비제도권과 네트워킹되어있다. 제도권과 비제도권 간의 배타적인 구분이 극명해진 것은 신자유주의가 진행되면서부터이다.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대학에 대한 자본의 포섭과 훈육이 날로 심해지면서, 획일적인 지식생산구조(학부의 경우는 산학협력체제, 대학원의 경우는 학진체제)에 염증을 느낀 학문후속세대들이 비제도권 교육공간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를 ‘지식인의 죽음’과 ‘떠오르는 대중지성’으로 부르며 대결구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각주:3]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도권과 비제도권 사이에서의 배타적 택일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인 지식생산구조 속에서 유실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말이다. 

  우리를 지칭하는 ‘학문후속세대’라는 용어는 사실 나에게 낯설면서도 불편한 표현이다. 학문후속세대라는 말에는 뭔가 유예되고 있는 듯한 느낌과 재생산에 대한 강박, 그리고 자조 섞인 동일시(identification)와 구별짓기(distinction)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학문후속세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학생’이라는 사회적 존재가 띠는 모호성 때문일 것이다. 40년 전 유럽의 대학생들은 이미 이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투쟁의 모호함

학생으로서 가지는 우리의 조건은 특권자라는 사실이다. 대학 기구의 역할은 앞으로 우리를 유능한 지배의 조직자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데 있다. 대학은 이익 수단이다. 우리는 그 봉사의 댓가로서 간부가 되어 이 이익의 일부분을 분배받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학 개량 활동은 필연적으로 현대 사회의 착취를 강화시킨다. 때문에 우리는 자기 모순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각주:4] 


대학은 졸업장 공장이다. (중략) 학생은 완성되어가는 생산품이며 대학과 사회의 관계란 원칙적으로 전혀 배제된 관계에 서 있다. 학생은 미래에 완성품으로서 사회의 일원이 된다고 하는 점에서 지금은 사회의 일원일 수 없다. ‘미래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학생을 사회의 계층적 상황으로부터 배제시키고, 초월적 존재로 묶도록 근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모욕을 우리는 특권으로 감사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런가.[각주:5]


학생의 지위

현재 학생의 지위는 학생들에 의해 두 가지 결함이 지적되고 있다.

1. 학생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는 점

2. 학생이 고립되어 있다는 점[각주:6] 학업은 교육서비스라는 형태로 생산된 가치를 단순히 소비하기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또 다른 지적 가치를 생산하는 수업노동이다. 우리가 쓰는 발제문, 텀페이퍼, 나아가 학위논문을 생각해보라. 학교도 전공도 다른 사람의 논문에 인용되어 있는 자신의 논문,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블로그에 스크랩되어있는 자신의 글을 생각해보라. 더욱 미시적으로 보면 우리가 수업시간에 나누는 토론, 발제문이나 책의 한 귀퉁이에 해 둔 메모조차도 우리의 사유 속에 남아 새로운 사유를 창조한다. 이처럼 우리의 수업노동은 인류의 지식과 정보를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노동을 하면서 우리가 받는 임금은 고작 학점과 학위이다. 우리는 오히려 1년에 천만 원에 달하는 학비를 ‘지불’해야 하며, 수업노동을 재생산하기 위한 생활비 역시 각자 해결해야한다. 학업의 교환가치화는 졸업 이후로 유예되어있거나 아르바이트라고 불리는 극도의 불안정노동 속에서만 구현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나는 지적 노동을 주장함에 있어서 저작권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반동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가장 정교화한 것이 바로 등재지와 비등재지를 차별하는 학진과, 등재지 투고횟수와 SCI 지수를 점수로 환산하여 임용심사에 반영하는 대학이 아니던가. 이것이 낳은 결과는 ‘연구자가 아니라 논문기계가 되어버렸다’는 비참한 자아비판뿐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고립된 개인으로 사고하는 것과 맞서 싸워야한다. 우리의 노동을 사회적 노동이 아닌, 개인의 총명함이나 부지런함으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와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글을 쓰거나 토론을 하면서 인용하는 무수한 지식들을 떠올려보라. 우리가 가치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 즉 수업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생산물은 결코 사적 소유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산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68혁명의 대학(원)생들처럼,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업노동자들의 파업[각주:7]처럼 사회적 임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야한다. 제한적인 장학금, 한시적인 프로젝트 지원이나 유토피아적인 안정적 고용전망과 같은 개인들 간의 경쟁의 산물이 아닌, 최소한의 보장소득으로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요구해야한다. 이것이야말로 공적자금에 대한 진정한 재전유이다. 가사노동을 위해 투쟁했던 선배들처럼 외쳐보자. 학생에게 임금을!




  1. http://jayul.net [본문으로]
  2. <다중지성의 정원>에 대해서는 취지문을 참조하라. (http://daziwon.ohpy.com/146491/1) [본문으로]
  3.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후마니타스, 2008. [본문으로]
  4. 편집부, 『프랑스 5월 혁명』, 1985, 30쪽 [본문으로]
  5. 앞의 책, 31쪽 [본문으로]
  6. [/footnote]


      구좌파 진영에서 굳이 68혁명을 쁘띠부르주아지의 혁명이라고 폄하하지 않았더라도, 혁명의 당사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지위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모욕을 당하고 있는가. 학생이라는 지위, 학업이라는 활동은 과연 우리의 사회적 삶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가. 우리는 구좌파의 의심어린 눈초리처럼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착취로부터 유예된 노동자로, 고등교육이라는 특혜를 받는 특권층으로, 혹은 아카데미라는 온실 속에서 ‘한창 좋을 때’를 누리고 있는 철없는 이등시민으로 너무 간단하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너무나 일면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한 표현으로, ‘수업노동’이라는 다소 낯선 용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수업노동은 보통 ‘학업’, ‘학교공부’ 등으로 번역되어왔던 스쿨워크(schoolwork)라는 단어를 재전유한 것이다.[footnote]Cleaver, Harry, “On Schoolwork and the Struggle Against It”, http://www.eco.utexas.edu/~hmcleave/ [본문으로]

  7. 최근 이탈리아에서는 금융위기와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안인 젤미니법이 맞물리면서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학생들은 물론, 부모, 교사, 연구자들까지 시위에 동참하고 있으며, 공식적인 수업을 폐쇄한 채 야외수업과 자유토론이 벌이며 해방학교, 해방대학을 만들어가고 있다. 다음은 riseup.net의 money banks crisis라는 메일링리스트에서 받은 이탈리아 소식의 일부이다. In october classes start in universities: a university student movement emerges powerfully: "We won't pay your crisis!" It's a loud and clear message that speaks of the here and now, of precarity, economic crisis and the last gasps of neoliberalism. "Cut resources to bankers and war missions, rather than to schools and universities! we are the coming society! We are not the problem, we are the solution!" (중략) Week by week the mov't grows: from elementary schools, teachers, parents, kids are united in denouncing the decree; high school collectives network their struggles; in universities researchers other precarious faculty and professors start joining student assemblies and discussing with student collectives. (중략) In the subsequent days, mobilizations further develop: in Milano, Torino and other cities dozens of motions to faculty boards, class blockades, assemblies, all-night events take place in freed universities. The first experiments with alternative higher education occur: academic lectures are held in central public squares before hundreds of students and curious citizens, wihle students speak of "free university and free knowledg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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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Hardt, "Politics of the Common" 노트

지필묵 2010. 8. 10. 03:05

Politics of the Common
By Michael Hardt, July 6th, 2009
[Contribution to the Reimagining Society Project hosted by ZCommunications]


- 공통의 부에 대한 대안적 운영(management)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공통적인 것은 두 가지 모습을 띤다. 생태학적/자연적 형태(이하 NC)와 사회·경제적/인공적 형태(이하 AC).

- 저항과 운동(activism)의 관점에서 두 가지 형태의 관계를 고찰해보자.
- 양자는 동일한 논리를 따르는데, 그것은 소유관계를 거부하며 그에 의해 약화된다는 점에 있다. 나아가 양자는 경제적 가치의 전통적 척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 대신 유일하게 유효한 가치화의 척도(scale), 즉 ‘삶의 가치’를 부과한다.
- 양자의 분할은 삶정치적 관점에서 흐려진다.

- 양자가 상반된 논리를 따르는 경우가 있다. 
  (1) NC가 보존과 한계에 주목한다면, AC는 창조, 개방성, 무한성에 주목한다.
  (2) NC가 인간/동물세계보다 더 넓은 이해관계의 장을 갖는다면, AC는 인류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 양자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순적 관계가 아니라 잠재적인 보완물이다. [UN기후회담을 둘러싼 행동들]

- 삶정치적 생산의 전제
  (1) 생산의 중심성[헤게모니]이란 생산의 다른 부문에, 그리고 사회적 삶에 부과된다는 점에 있다. 즉, 과거에 산업생산이 중심성을 가진 것은 그것이 산업‘경제’만이 아니라 산업‘사회’를 창조했다는 데 있다.
  (2) 이제 산업생산은 더 이상 위계적 위치를 점하지 않는다. 즉, 다른 부문들과 사회 전체에 부과되지 않는다.
  (3) 이제 중심성은 비물질적 생산에 있다. 인지적·정동적 도구들, 임금관계의 불안정하고 비보장적인 성격, 비물질적 생산의 시간성(노동일 개념의 파괴).

- 이러한 생산은 ‘삶정치적’이다. 생산이 ‘삶정치적’이라는 것은 생산이 궁극적으로 사회적 관계들과 삶 형태를 생산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삶정치적 생산에서는 생산/재생산의 구분이 사라진다. 
- 이것은 생태학적 담론과 삶정치적 생산의 근접성을 보여준다. 양자 모두 삶 형태의 생산/재생산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양자의 중요한 차이는, 생태학적 관점의 경우 ‘삶 형태’에 대한 생각을 인간/동물에 제한시키지 않고 더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 재산형태의 위계 : 산업생산 이전 시대에는 이동불가능한 재산 중심이었던 반면, 산업생산 시대에는 이동가능한 재산 중심, 즉 상품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비물질적 재산이 물질적 재산을 지배한다. 비물질적 재산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은 비물질적 생산의 중심성이 높아짐을 증명한다.

- 전산업생산에서 산업생산으로의 이행에서는 이동성이 중요했던 반면, 산업생산에서 삶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에서는 배타성(exclutivity)과 재생산성(reproductivity)이 중요해진다. 삶정치적 생산에는 (1)희소성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고, (2)무제한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하며, (3)개방적으로 공유되더라도 유용성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잠재력이 높아진다.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
  (1) 지배적인 형태로 출현하는 생산형태는 일반적으로 비물질적/삶정치적 재화로 귀결되는데, 이것은 공통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적이고 재생산 가능하며 점점 배타적 통제가 어려워진다.
  (2) 미래의 경제발전에 있어 그러한 재화들의 생산성은 공통적이 되는 데 의존한다. 사적인 것으로 유지시키는 것은 새로운 것의 생산에 무익하며 그것을 저해한다. 자본은 (역설적으로) 점점 공통적인 것에 의존한다.

<공통적인 것의 두 가지 논리적 특징>
  (1) 소유관계를 거부하고 그것에 의해 약화된다.
- 비물질적 소유형태는 배타적 권리를 지키기 어려우며, 사적인 것으로 만들면 생산성이 떨어진다. 
- 생산의 핵심에서 강력한 모순이 출현하는데, 그것은 생산성을 위한 공통적인 것과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한 사적인 것의 충돌이다. 
- NC 역시 소유관계를 거부한다. 환경적 효과들(그것이 이로운 것이든 해로운 것이든)은 항상 소유관계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유관계에 의해 약화된다. 축적의 사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피해는 사회적(보편적)이다. => 생산의 공통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사적 성격 사이의 갈등. [볼리비아 물․가스 투쟁]
  (2) 지배적인 가치척도를 초과한다.
-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외부성”. 회계사들이 말하는 “무형자산”.
- 가치척도를 초과한다는 것은 양적 초과가 아니라 척도체계 자체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 삶정치적 재화의 가치화에서 금융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생산의 새로운 지배적 형태들을 포착하는 데 무능하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 오늘날 경제적 재화와 활동의 가치가 전통적 척도를 초과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 생산에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 NC 역시 측정불가능하며 척도에 순응하지 않는다. 온난화나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파괴된 삶 형태의 가치는 측정불가능하다. 교토의정서 등 각종 협약들은 공통적인 것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측정하지 못한다. 다만 아주 간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해치고 부패시키는 가스의 생산에 화폐적 가치를 할당할 뿐이다. => 삶 형태는 측정불가능하다. 아마도 그것은 삶의 가치에 기반한, 근본적으로 다른 척도를 따를 것이다. 이것은 창안되어야 한다.

-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들이 모두 소유관계에 저항하듯, 양자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전통적 척도를 거부한다. 양자가 공유하는 특질들은 자율을 위한 정치적 행동과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운영을 연결시키는 데 토대를 구성한다.

- 공통적인 것의 정치
(1) NC : 희소성과 한계에 관한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아주 많은 사람들을 지속(생존)시키면서도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재생산된다.(The common can only sustain so many people, for instance, and still be successfully reproduced.) 지구, 특히 야생의 공간은 산업적 발전과 여타의 인간행위들이 주는 피해에 맞서 지켜져야 한다. <보존과 한계>
(2) AC : 생산의 무제한적 성격을 강조한다. 아이디어, 정동 등을 포함한 삶 형태의 생산에 고정된 한계란 없다. 물론 그것은 더 많은 아이디어가 반드시 더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희소성의 논리 하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제한 없는 창조적 잠재력>

- 공통적인 것을 위한 투쟁들 사이에 있는 기본적 갈등들
(1) NC는 발전에 반대하고 AC는 발전에 찬성한다? : 이것은 너무 단순한 관점이다. 두 경우에서 다뤄지는 발전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즉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생산과 관련된 발전은 산업적 발전과 분리되기 때문이다.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전통적 분할이 붕괴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나면, <보존>에 대한 요구와 <창조>에 대한 요구가 반대되지 않고 상보적임을 더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인간의 이해관계가 준거틀이 될 경우 : AC는 인류의 이해관계를 중시하지만, NC는 인류를 넘어 생태 전체(비-인간의 이해관계까지)를 다룬다.

메모 : NC를 사고할 때 필요한 관점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이다. NC의 영역에서 강조되는 <보존>은 접근 금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인위적 보존(가령 그린벨트)이 아니라, NC의 자기재생산 능력의 보존이다. 산업생산과 다른 접근, NC의 자기재생산 능력을 해치지 않는 공통적 접근이 필요하다.[성미산투쟁] 이것은 바꿔 말하면 ‘인류를 위해 자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가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가’라는 관점이다. 

- 이러한 차이는 넘어설 수 없거나 파괴적인 차이가 아니다. 이것은 운동에서나 이론에서나 양자에게 이롭다. 지구의 한계와 다른 삶 형태(비-인간 영역)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대면하는 것이 사회적 투쟁에 집중하는 이들에게 유익하듯, 사회적 위계의 성격과 그 위계와 싸울 수단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대면하는 것은 환경에 집중하는 이들에게 유익하다.

-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정치가 직면하고 있는 몇몇 핵심쟁점들을 명명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 공통적인 것을 놓고 투쟁하는 것과 그것을 운영할 대안적 수단들을 창안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를 재구상하는 기획에 있어 근본적이다.
- 공통적인 것의 두 측면의 분기와 차이들은 절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차이 자체는 건강하며 우리를 전진시킨다.
- UN기후회담에 주목. 환경운동가, 반자본주의운동, 다른 사회운동들의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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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우리가 기다릴 수 없는 이유"

지필묵 2010. 6. 1. 01:46


성문종합영어를 보면서 울컥하게 될 줄이야.. 



인종차별의 날카로운 화살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기다려"라고 말하기 쉬울 겁니다.

그러나 악랄한 군중들이 당신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제멋대로 린치를 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그리고 당신의 형제 자매들을 마음대로 익사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혐오에 찬 경찰이 당신의 흑인 형제 자매들을 저주하고 발로 차고 폭행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의 여섯살짜리 딸에게 방금 TV에서 광고한 공공놀이공원에 왜 갈 수 없는지를 설명하려고 할 때 갑자기 혀가 꼬이고 말을 더듬게 되는 걸 느낀다면, 유색어린이들은 "놀이동산"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딸의 조그만 눈에 눈물이 솟는 것을 본다면, 딸의 어린 마음의 하늘에 열등감이라는 우울한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면, 그리고 딸이 무의식적으로 자라나는 백인에 대한 원한으로 자신의 어린 인격을 망가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면, 
"백인", "유색인"이라고 적힌 성가신 표시에 날마다 굴욕을 당한다면,
계속 발끝으로 선 채로 살면서 당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에 낮에는 괴롭힘당하고 밤에는 망령에 쫓긴다면,
당신이 타락한 의미에서의 "보잘것없음"과 영원히 싸우고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왜 우리가 기다리기 어려운지를 이해할 겁니다.  


- 마틴 루터 킹, "우리가 기다릴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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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Manifesto: occupation at the University of Puerto Rico (korean translation)

지필묵 2010. 4. 25. 03:29


푸에르토리코 대학 점거 선언문




인문학부는 당신의 것이자, 그/녀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참여와 협력으로 가득찬 활발하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자. 경쟁과 우려라는 국가 및 행정부의 태도를 바꾸고 협력, 열정, 젊음의 환희로 대체하자. 

현존하는 권력구조들이 이미 균열을 일으켰고 자신의 안티휴머니스트적 의제들을 드러내었으니, 현재와 미래는 사랑과 행동에 대한 호소로 채워져야할 것이다. 우리의 학문공간들은 권력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며, 그것은 해방의 도구로서 환수되어야 한다. 휴머니스트들인 우리는 모든 종류의 가능한 세계들을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다. 이 가능한 세계들을 현실로 바꿀 때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고자, 우리를 분리시키고 소외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떨쳐내고자 학부를 점거하고 있다. 그러한 죽음 대신 우리는 우리 입에 채워진 재갈을 벗어버리기로,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형성되었음을 세계에 알리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생각하고 성찰하고 비판하는 다중이다. 우리는 심장박동이 주먹과 입맞춤의 상호작용으로 다져진 세대이다. 

이것은 대학을 지키자는 호소가 아니라, 수평적이며 위계적이지 않은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새로운 어떤 것으로 다시금 의미를 부여하자는 호소이다. 

우리의 행동은 다양함에 대한 호소이며, 우리의 교육공간을 정의하는 복수성에 대한 호소이다. 그것은 새롭고 상이한 세계들, 나라들, 도시들, 다중들, 공간들에 기여하는 모든 유형의 풍부한 지식 전체이다. 


우리는 위기와 주변화의 자녀이며, 억압과 약탈의 경제체제의 자녀이다. 우리는 참여를 비난하고 위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정치체제의 후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권리들을 위한 길을 개척한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 절멸에 직면해있는 그 혜택들을 위해 땀과 피를 지불한 사람들의 기나긴 전통의 계승자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이 우리가 세우고자 노력해온 것을 갖도록 푸에르토리코 대학을 탈환하는 중이다. 그것은 지식의 다양성,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그리고 우리가 창조하기로 선택하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관점들의 다양성이다.

국가와 대학 행정부가 공유하고 있는 재정적 집착은 교육을 소비재의 생산라인으로 생각한다. 인문학은 생산라인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기적 임금인상에 따른 제거대상이 되었다. 

인문학이 제공하는 것이자 국가와 대학 행정부가 무시하기로 한 것은, 비판적으로 될 기회,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할 기회, 소리·색깔·퍼포먼스의 세계에 형태를 부여할 기회, 우리의 말과는 다른 말로 쓰여질 기회이다. 교육은 자본의 좁은 시선이나 시장의 변덕스런 기분을 통해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교육은 고분고분한 주체와 무비판적인 자동기계를 재생산할 뿐이다.

그 기계를 부셔버리자!

우리는 교수와 학생 간의 협력적 유대 속에서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낳는, 해방적이고 유익한 교육을 제안한다.

우리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 즉 가르치는 사람들과 배우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교육을 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동사[가르치다, 배우다]를 선생과 학생에게 부과된 역할과 혼동하지 말자. 그것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교육은 써발턴과 주변화된 사람들을 학문의 주체로 포함해야 한다. 이주민,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여성, 남성, 나이가 많은/적은 사람. 


이러한 참여적·민주적 교육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학문과 그 주체들 간의 강한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연대는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으로가 아니라, 옆에서 구축된다.

옆사람을 안아주고 그/녀의 귓가에 당신이 그들의 존재를 긍정하며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이라.

상상과 변화의 결실을 낳을 기름진 토양에 내린 뿌리들처럼 우리의 몸을 서로 뒤얽자.


우리 손으로 존엄과 존중의 풍경을 그리자.

걱정하지만 말고 옆에 서라! 점거하라! 


http://emancipating-education-for-all.org/manifesto_upr_en

twitter @ISM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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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wealth> 3.1.3 "삶정치적 생산과 통제의 위기" 논의의 틀

지필묵 2010. 4. 20. 19:36


 '노동'의 기술적 구성
자본의 대응 (통제방식) 

다중의 요구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 
공통적인 것을 파괴하기

재전유권 
 노동의 여성화
불안정성(precarity) = 시간의 빈곤

보장소득 
이주와 사회적 혼합 
 인종적·사회적 장벽들 = 공간의 빈곤  

전지구적 시민권 

                       구성                                             탈구성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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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NO! G8 Action 리플렛

지필묵 2010. 4. 12. 00:16

2008년 G8정상회담에 대항하여 NO! G8 Action이 만든 리플렛 전문.



G8회담이란?

2008년 7월 홋까이도 토야호에서 G8정상회담이 열린다.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러시아 8개국 정상과 EU 위원장이 참가하여 개최되는 정상회담이다.
회담은 1975년 2번의 닉슨 쇼크(달러쇼크와 오일쇼크)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미국의 특권적인 지위가 흔들리자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유럽 국가들이 소집된 것이다.
회담은 통화와 무역, 안전보장 등을 선진국끼리 조정하기 위한 사적인 회합이다. 자본주의의 주요국들이 협조하여 세계의 부를 독점하기 위한 궁리를 하는 장이 바로 이 회담이다. 그러한 세계전략의 중심이 되어온 것이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정책이다.
현재 세계적인 빈곤은 회담이 주도하는 세계정책, 즉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만들어졌다.
 
빈곤과 공포를 확산하는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은 1973년. 남미 칠레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실현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장군은 쿠데타를 통해 민주정권을 뒤엎고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다. 이때 칠레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을 담당한 것이 미국의 경제학자, 즉 신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 정책은 네 가지로 구성된다.
1.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
2. 사회보장 삭감과 공적 사업의 민영화
3. 노동조합, 농민단체 등 금지
4. 군비와 경찰 강화
이 정책은 실업과 빈곤을 확대시키고 삼엄한 경찰국가를 가져온다. 칠레의 경제는 일시적인 버블경기 이후, 심각한 불황에 빠져있다. 생활이 곤궁한 민중들의 목소리는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버린다.
칠레에 이어 영국의 대처 정권, 미국의 레이건 정권, 일본의 나까소네 정권이 이 정책을 자국에 적용한다. 80년대에는 IMF(국제통화기금)가 아프리카 국가들에 구조조정정책(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제한다. 이에 따라 농촌은 황폐해지고 공공써비스는 마비되고 사회보장은 사라지고 국민경제는 붕괴되어간다.
90년대에 들어서면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커다란 국제운동이 시작된다.
94년 멕시코 남단에서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봉기한다. 싸빠띠스따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의 위협을 고발하고 세계적 규모의 반대운동을 호소한다. 95년 MAI(세계투자협정)에 반대해 한국과 프랑스에서 큰 운동이 일어난다. 이 반대운동에 의해 MAI는 폐기된다. 97년 통화위기에 빠진 한국에 IMF가 개입한다. IMF의 내정간섭에 대항하여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격심한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99년 미국의 씨애틀에서 WTO(세계무역기구)의 각료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는 거리에 흘러넘친 항의행동에 의해 중지되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회담

G8회담은 ‘모든 사안을 톱-다운(top-down; 상명하달)으로 결정한다’(외무성HP)는 것을 공공연하게 단언하고 있다. 그들은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적절한 결단과 조치를 신속하게 행하는 것’(외무성HP)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비민주적인 회합은 ‘적절한 결단과 조치’를 취해왔던 것일까. 사태는 정반대이다. 이 밀실회합은 전세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세계 대다수의 생활이 파괴되어왔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관료와 거대은행, 경찰이나 자위대가 세력을 떨치고 대다수가 빠듯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다. 지역경제는 피폐해지고 젊은이는 실업을 겪고 고령자는 방치되는 이러한 절망적인 사회를 만든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이며 이 회담이다. 그리고 이런 심각한 정책이 태연하게 실행되어온 것은 회담이 민주주의의 부정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G8회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생활을 소수의 특권계급이 제멋대로 결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 자신의 생활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와 사정을 제대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결정하기 원한다. 부자와 경찰만이 살찌는 사회는 민주적인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며 함께 목소리를 높이자.
 

NO! G8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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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토] 아감벤,『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지필묵 2010. 3. 7. 11:37



아감벤의『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은혜



1. 예외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은 주권, 호모 사케르, 수용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삶/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고찰하는 저작이다. 아감벤은 이 세 가지 키워드를 모두 ‘예외’라는 역설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그는 주권의 예외화, 삶의 예외화(호모 사케르), 예외적인 공간 확정(수용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외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아감벤의 논의의 배경인 삶정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아감벤은 푸꼬의 삶정치론을 참조하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근대의 이데올로기로서 뿌리내렸던 삶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구분, 즉 생물학적 삶으로서의 조에와 정치적 삶으로서의 비오스라는 구분을 전복하는 것이었다. 푸꼬에 따르면,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정의는 인간이 조에를 가지면서 ‘덤으로’ 비오스를 갖고 있다는 관점을 전제한다. 푸꼬는 조에와 비오스가 별개의 영역이라는 이러한 관점과 달리, 근대적 인간을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36)로 정의함으로써 조에와 비오스가 뒤섞여 구분되지 않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정치, 즉 삶정치를 제시한다.



  주권과 호모 사케르


  아감벤은 주권의 역설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칼 슈미트를 따라 주권의 구조를 예외 구조―주권자가 “법의 외부에 위치하면서 법의 외부란 없다고 선언”하는 구조(56)―로 사고한다. 슈미트에 따르면 “예외란 포섭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일반적인 정식화의 범위를 넘어선다.”(56) 따라서 예외적 주권자는 법질서의 전제가 되는 질서, 즉 정상적인 상황을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포섭될 수 없음’은 일종의 배제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무관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배제시킴으로써만 그것을 포함하는”(61) 극단적인 관계를 의미하며, 아감벤은 이러한 관계를 예외관계라고 부른다. 요컨대 주권은 스스로를 예외상태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즉 규칙(법)의 효력을 정지시킴으로써 규칙(법)이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예외상태야말로 오늘날의 근본적인 정치구조이자 궁극적 규칙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예외상태 속에서 삶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아감벤은 카프카의 우화 『법 앞에서』를 통해 제시한다. 법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법 앞을 떠나지도 못하는 시골 사람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문지기에 가로 막혀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는 법으로부터 배제되었지만, 법의 문이 그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는 법에 포함되어있다. 여기서 아감벤은 법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비식별역을 주권의 장으로, 그리고 이 비식별역을 결정하는 존재를 주권자로 규정한다. 이처럼 “법이 삶을 참조하며 또 삶을 보류함으로써 삶을 자기 내부에 포함시키는 본래적인 구조”(79)가 바로 주권의 구조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주권은 자신의 존재기반인 삶에게 추방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것이 법 바깥으로 쫓겨나 법과 무관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삶은 추방(배제)되지만, 추방령 속에 포함된 채로 남아있다. 따라서 추방령이란 관계없는 것과의 관계설정, 즉 예외상태로의 유배이다.

  아감벤은 추방령의 대상으로서의 삶을 호모 사케르에서 찾는다. 이것은 벤야민에게서 빌려온 벌거벗은 삶(nuda vita, bare life)[각주:1]이라는 개념과도 일치한다. 호모 사케르의 추방은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156)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신의 법과 인간의 법 모두와 예외관계를 맺는데, 양자와 무관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즉 양자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배제된다. 다시 말해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음의 형태로 신에게 바쳐지며 또한 죽여도 괜찮다는 형태로 공동체에 포함”(175)되는 것이다.

  죽여도 되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호모 사케르는 “성과 속, 종교적인 것과 법적인 것 사이의 구분 이전의 영역에 위치한 어떤 근원적인 정치적 구조”를 보여주는 단서와도 같다. 그러나 그것이 단서일 수 있는 것은 신성함이 갖는 본래적인 양가성[각주:2] 때문이 아니라, 호모 사케르가 처한 비식별역이 곧 “신성한 제의의 장도 세속적 행위의 장도 아닌 새로운 인간 행위의 장”(176)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감벤은 신의 법(희생 제의)과 인간의 법(형벌) 모두를 초월한 호모 사케르에게서 정치의 근원을 찾고 있다. 그리고 삶의 신성화를 정치의 근원으로 정초함으로써, 그는 그동안 인권의 차원에서 소박하게 그러나 초월적으로 다루어졌던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담론에 내재적인 삶정치적 지평을 열어준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의 삶정치적 성격이 드러나는 예로 생사여탈권을 드는데, 여기서 생(生)은 사(死)에 의해 위협 받는다. 이처럼 정치는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삶(벌거벗은 삶, 호모 사케르)을 전제한다. 벌거벗은 삶은 생사여탈권 하에서 법적·정치적 질서로 포섭되지만, 반대로 “죽음의 가능성 그 자체를 통해 정치화되는 생명”(186)이 정치를 정초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정치적 지평에서 벌거벗은 삶(추방령의 대상)과 정치적 신체(추방령의 결정권자)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의 또 다른 형상으로 인간인 동시에 짐승인 늑대인간을 제시한다. 흥미롭게도 그는 늑대인간을 통해, 추방당한 자의 원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홉스의 자연상태(‘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를 새롭게 조명한다. 이로써 홉스의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에게 벌거벗은 삶인 상태’로 재정의된다. 이 책의 제사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홉스는 “국가가 분해된 것은 아니지만 마치 분해된 상태인 것처럼 간주”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홉스가 리바이어던이라는 정치적 신체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근거인 자연상태는 국가 이전에 실재했던 무질서가 아니라 국가(법적·정치적 질서의 공간)를 창출하기 위한 질서의 정지, 즉 예외상태이다. 

  처벌권에 대한 언급에서 홉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주권의 토대는 “신민들이 그 권리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 그 자신의 처벌권을 행사하도록” 주권자를 강화한 것에 있다.(217) 다시 말해 그것은 계약을 통한 자발적인 자연권 양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외상태를 통한 주권자의 자연권 보존에 있는 것이다. 이제 정치권력은 자유의지에 기반한 사회계약의 산물이 아니라 추방령, 즉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삶의 결합의 산물이다. “추방령이란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자신에게 인도하도록 만드는 권한, 즉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미리 전제된 어떤 것과의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힘”이며, “추방된 자는 자신의 분리된 상태 그 자체로 넘겨지는 동시에 자신을 내버린 자의 자비에 위탁된다.”(223) 이러한 추방령의 구조는 예외적인 공간 확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삶의 정치화 : 난민과 수용소

 

  아감벤은 예외적인 공간 확정, 즉 ‘예외상태의 물질화’로서 수용소를 제시한다. 수용소는 전시상황이라는 예외상태를 근거로 (근대적 삶정치의 기초인) 신체의 자유를 유보시키는 공간이다. 수용소로의 추방은 언제나 격리-수용(隔離-收容), 즉 배제인 동시에 포함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용소는 삶이 정치적 지위를 박탈당하는(배제) 동시에 주권과 어떠한 매개도 없이 대면하는(포함) 예외적 공간이다. 따라서 그것은 전체주의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주권체제의 공간이기 전에, 삶정치의 공간이다.

  정치의 삶정치로의 이행이 ‘삶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 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자유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공히 벌거벗은 삶을 긍정한다. 다만 전자는 신체(개인)의 자유와 그것에 기반한 사적인 것을 보호함으로써 긍정하고, 후자는 신체 자체를 주권적 결정의 장소로 삼음으로써 긍정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신체(의 자유)에 대한 긍정에서 삶정치로의 이행의 징후를 찾는데, 그는 절대주의와의 투쟁의 산물인 ‘인신보호영장’을 그 예로 든다. 그것은 ‘신병확보’와 ‘신체의 자유’를 동시에 정초함으로써 신체의 양가성을 드러낸다. 이로써 근대의 신체는 “주권권력에 대한 예속의 대상이자 개인적 자유의 담지자”가 된다.(245) 아감벤이 주목하고 있듯이, 유럽의 민주주의가 절대주의에 맞서 인간(비오스)이 아닌 신체(조에)를 내세운 것은 곧 벌거벗은 삶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정치 담론, 특히 인권과 국가의 관계에서 출생이 갖는 중요성과 직결된다. 아감벤은 인권선언문을 메타-법률로 삼는 관습적인 독해 대신 그것이 국민국가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기능하는 측면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특히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권리를 보장받는 존재에서 권리를 보전하기 위해 정치적 결사를 행하는 인간으로, 그리고 주권의 원천인 국민으로 변형된다.[각주:3] 즉 인권선언은 왕권신수에서 국민주권으로의 이행에 대한 선언이며, 이때 인권은 출생에서 출발하지만 그 즉시 국민이 되는 예외적 존재―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시킬 수는 없는 벌거벗은 삶―에게만 주어진다. 즉 인권의 존재방식은 예외이자 소여이며, 그 예외와 소여를 결정하는 것은 주권이다.

  주권의 결정은 역사적으로 ‘시민권’에서 두드러졌는데, 우리는 누가 시민이고 누가 시민이 아닌지를 규정하는 것에 대한 주권의 집착으로부터 벌거벗은 삶이 주권의 기초로서 자리한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권에 대한 집착은 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모두 공유하고 있으며, 전체주의는 그것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전체주의를 독해하면서 방점을 찍어야 할 지점은 그것의 유례없는 잔학무도함이 아니라, 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근대 정치체제의 양극단이 갖는 공통분모, 즉 벌거벗은 삶이 주권의 기초가 되는 삶정치적 맥락이다.       

  그러나 출생이 곧 국민으로 기입됨(‘출생신고’를 떠올려보라!)을 의미하는 오늘날, 양자는 서로 너무나 밀착되어있어서 그로부터 벌거벗은 삶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아감벤은 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허구를 폭로하는 것으로서 난민과 수용소를 제시한다. 난민과 수용소는 출생과 국민국가 사이의 간격을 드러낸다. 난민은 한편으로는 추방당하고(국적 박탈) 다른 한편으로는 보호받는(인권 보호) 오늘날의 호모 사케르이며, 수용소는 호모 사케르가 처한 예외상태의 물질화이다. 국적 박탈이 ‘국민으로서의 삶’을 거세하여 벌거벗은 삶을 창출하려는 시도라면, 인권 보호는 그 벌거벗은 삶을 다시금 포섭하려는 시도이다. 인도주의는 삶을 신성화함으로써―죽여도 좋은 상황은 문제 삼지 않은 채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만을 반복함으로써―삶을 보호의 대상으로 만든다. 인도주의는 야훼가 카인에게 붙여준 표[각주:4]처럼, 삶의 격리-수용을 극복하기는커녕 끝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죽음의 정치화 : 안락사, VP, 심층코마/뇌사


  출생과 국민의 즉각적인 연결을 통해 유지되는 국가는 당연하게도 ‘건강’에 주목하게 된다. “이제 정치의 유일한 진정한 문제는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보살핌, 통제, 향유를 보장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정치조직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일 뿐”(240)이다. 아감벤은 우생학에 대한 논의를 (광기나 잔혹함으로부터가 아니라) 삶에 대한 국가의 배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삶을 “살아 있는 부”(278)로 간주하는 것으로, 이때부터 의학이 주권의 영역으로 통합되고 정치가 ‘경찰’로 나타난다.[각주:5] 정치가 경찰이 된다는 것, 즉 주권이 삶을 보살피는 데 복무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삶정치적 현상이다. 이러한 보살핌은 삶에 대한 개입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개입은 ‘삶의 정지’에 대한 결정으로까지 나아간다. 삶정치의 극단에 죽음정치(tanatopolitica)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감벤은 안락사 환자, 생체실험 대상(VP, 인간 모르모트), 심층코마/뇌사 환자를 통해 죽음의 정치화를 조명한다. 안락사는 삶의 가치에 대한 결정권과 관련된 것으로 그에 관한 법규는 면책살해를 보장하는 법규와도 같다.[각주:6] 생체실험은 주로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삶이 공동체에 기여하는(포함되는) 방식으로 죽음(최종적 배제)을 맞는 무대이다. 그리고 심층코마와 뇌사라는 개념은 삶과 죽음의 비식별역을 창출함으로써 사망시각에 대한 결정을 재정립한다.

  이러한 죽음정치의 사례들에서 모든 삶은 호모 사케르의 극단적인 형태를 구현한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고유한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개념, 즉 그 자체로서는 오로지 결정을 통해서만 정확한 의미를 얻게 되는 정치적 개념”(312)이 된다. 따라서 “벌거벗은 생명은 더 이상 특정한 장소나 특수한 범주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생물학적 신체 속에 깃들어 있다.”(26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치의 삶정치화―삶/죽음에 대한 결정이 가장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것―와 권력의 삶권력화―유일한 결정권자인 주권이 “법률가뿐만 아니라 의사, 과학자, 전문가, 사제와 점점 더 밀접한 공생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241)―이다.   



2. 문턱


  아감벤은 이러한 예외들을 연구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잠정적 결론을 도출한다. 첫째, “근원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령이다.” 이것은 사회계약론과 귀속 관념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둘째, “주권권력의 근본적인 행위는 … 벌거벗은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과 문화, 조에와 비오스가 결합된) 비식별역으로서의 삶/생명을 정치의 근원으로 삼음으로써, 시민권이 정치적 자유의 기초라는 관념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셋째, “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 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이다.” 이것은 공적 공간을 사유하고 조직함에 있어 벌거벗은 삶이 갖는 중요성을 주장한다.(341-342)

  이처럼 아감벤의 예외들이 갖는 정치적 함의는 오늘날의 정치가 삶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삶을 끊임없이 예외화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아감벤은 근대의 정치를 탈근대적으로 사유하는 이론적 이행에 있어서 벌거벗은 삶을 일종의 문턱(threshold)으로 사고한다. 그것은 주권과 삶의 근대적 관계를 자유의지에 따른 계약(민주주의)이나 광기와 비참(전체주의)으로 설명하는 근대의 이데올로기들을 논파한다. 그러나 벌거벗은 삶은 ‘정치의 근원’이라는 존재론적 자리매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력하다. 거기에는 추방만 있을 뿐 해방은 없다. 이 순간 문턱은 넘어섬의 계기가 아니라 주저앉음의 계기가 된다.



  


  아감벤은 삶정치와 몸의 정치를 적극적으로 펼친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탈근대 정치이론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급진성은 벌거벗은 삶이 “정치권력에 대한 우리의 예속을 표현”(343)하는 것에 머무는 순간 약화된다. 정치권력이 그러한 예속에 의존하고 있다하더라도, 그래서 존재론적 근원성을 가진다하더라도 새로운 삶의 구성과 생산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 그것은 무력하다. 그렇다면 아감벤에게 삶과 몸은, 아니 비타(vita)와 코르푸스(corpus)는 도대체 무엇인가. 

  비타와 코르푸스로 음역한 이유는 그것을 번역할 때 생기는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어려움은 기술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아감벤의 삶정치 개념이 갖는 특유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실제로 아감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비타와 코르푸스가 생명과 생명체로 번역됐을 때 더 자연스럽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 그의 삶 개념은 조에적 측면이 압도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는 푸꼬를 따라 근대적 삶을 조에와 비오스의 비식별로 설명하지만, 그가 그리는 주체의 형상은 무언가를 구성하고 생산하는 질적인 삶이라기보다는 생사(여탈)의 기로에 놓여있는 생명 혹은 생명체이다. (이것은 죽음정치에 대한 논의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감벤은 정치철학의 신체의 유비를 벌거벗은 삶과 밀접한 것으로 파악하는데, 이는 리바이어던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리바이어던을 “주체들의 신체가 살해당할 수 있는 절대적 가능성”으로 형성된 정치적 신체로 간주한다.[각주:7](246) 여기서 개개의 신체가 탈주할 가능성, 그리하여 리바이어던을 붕괴시키고 전혀 새로운 몸을 구성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삶정치의 물질화로 수용소―더 나아가 생체실험실, 소생실과 같은 죽음정치의 공간―가 제시된 것 또한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분석은 (마치 아감벤이 감금에 대한 푸코의 연구가 수용소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듯이) 왜 저항의 장소나 생산의 장소를 연구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아감벤이 보이는 조에와 죽음정치에 대한 편향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감벤의 삶정치 개념을 재검토해야 한다. 그가 주권과 관계 맺는 삶으로 제시한 벌거벗은 삶은 구성적 삶이 아닌 비-죽음으로서의 삶, 그야말로 삶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삶이다. 아감벤의 삶 개념이 구성 혹은 힘의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조에와 비오스의 비식별이 언제든지 분리 가능한 정도로만 식별되지 않을 뿐임을 의미한다. 삶정치를 주권으로의 예속이 아니라 주권과의 투쟁으로 사고한다면, 그리고 나아가 새로운 삶의 구성으로 사고한다면, 그가 인용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 대한 푸꼬의 비판은 그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삶의 힘, 혹은 힘으로서의 삶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아감벤은 ‘힘’을 벌거벗은 삶에서가 아니라 주권의 영역에서 다룬다. 주권의 영역에서 힘의 문제는 제헌권력과 제정된 권력의 관계로 나타난다.

  아감벤은 슈미트와 네그리를 비교하면서 제헌권력과 주권권력의 관계를 논한다. 슈미트는 제헌권력을 “고유한 정치적 실존 양상과 형식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 전체에 부합하는 일종의 정치적 의지”로 사고하며, 그것이 “모든 헌법 제정 이전에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여”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제헌권력이 헌법 제정에 선행하는 인민의 제헌의지와 동일시되는 것은 제헌권력과 주권권력의 교착(인민주권)을 의미하며, 그것은 그에게 문제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권을 갖거나 제헌적 권력의 주체나 담지자가 되지는 않”는 헌법기관을 출현시킴으로써 그러한 교착을 막으려 한다. 반면 제헌권력을 “자유 속에서 갱신되며 일련의 자유로운 ‘실천’을 통해 조직되는 어떤 구성적 행위의 ‘실천’”으로 사고하는 네그리는 제헌권력의 환원불가능성에 주목한다. 제헌권력이 주권권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이 “제헌권력의 확정”으로, “그것이 담지한 자유의 고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106-107)

  아감벤은 네그리의 제헌권력론으로부터 정치의 존재론적 위상을 발견한다. 제헌권력이 환원불가능하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정치권력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론적인 힘(potenza, potentiality)의 구성에 관한 문제임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제헌권력과 제정된 권력의 관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potentiality, dynamis)과 현실성(actuality, energeia)의 관계로 옮겨놓는다. 이러한 구도에서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잠재성의 존재양식과 자율성이다. 그는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잠재성(im-potentiality, adynamia), 즉 ‘~이지/하지 않을 잠재성’에서 찾는데, 잠재성이 비잠재성이 될 때 그것은 현실성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아감벤은 현실성에 대한 잠재성의 자율성, 즉 현실화되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을 “자체의 지양”(111)이라고 표현한다. 이로써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는 ‘~일/할 잠재성의 현실화’가 아니라, ‘~이지/하지 않을 잠재성의 유보’가 된다.

  이러한 사유는 ‘현실화되지 않은 것은 곧 존재하지 않는 것’(현실성에 대한 종속)이라는 관념과의 투쟁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그러한 관념은 경계되어야 하고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성을 잠재성의 완성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과 잠재성을 현실화되지 않을 (비)잠재성으로 사고하는 것 사이의 논리적 연관은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아감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잠재성의 완성을 부정하고 (비)잠재성의 유보를 긍정하는 것은, “잠재성이 실현됨으로써 매번 즉각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지속성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111) 그런 의미에서 유보는 곧 보존하는 동시에 제거하는 것(지양)이다. 이처럼 잠재성이 ‘현실화되면 사라지는 것’, 그래서 ‘보존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고되는 한, 그 잠재성 혹은 존재론적 힘(potenza)은 벌거벗은 삶이 그러하듯 구성의 관점을 결여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감벤이 잠재성으로부터 활력/구성력이 아닌 주권을 읽어내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비)잠재성과 현실성이 맺는 관계, 즉 ‘않을 잠재성’이 ‘자체의 지양’을 통해 현실화되는 구조는 “자신을 [예외에] 적용시키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예외에 적용시키는 주권의 구조에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13) 예외란 없다고 선포함으로써 자신을 예외화하는 주권은, 더 이상 잠재성과 현실성을 구분할 수 없는 비식별역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권적 비식별역은 아포리아로 남게 된다.



  그러나 아감벤의 사유가 아포리아의 발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호모 사케르』의 말미에 “비오스가 오로지 자신의 조에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러한 삶을 ‘삶-의-형태’(forma-di-vita)로 명명한다. 그것은 “그 형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삶”, “살아가는 와중에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역량의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감벤은 더 나아가 사회적 역량으로서의 일반지성과 그것의 물티투도적 성격까지 포착하고 있다.[각주:8] 『호모 사케르』가 준 아포리아의 놀라움이 어떤 구성적 기획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해방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채워나가는 것은 아감벤에게나 우리에게나 동일한 과제로 남겨져있다.   



  1. 『호모 사케르』 한국어판에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번역되어 있다. bloße/nuda/bare는 ‘탈(脫)’이라는 어감을 갖는 ‘벌거벗은’이 아니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어판 역자도 지적하고 있다. 38쪽 역주 3번 참조.) 이 글에서는 이미 정착된 ‘벌거벗은’이라는 역어를 취하되, 생물학적인 상을 떠올리게 하는 ‘생명’ 대신 질적인 차원을 포괄하는 ‘삶’을 취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2. 신성함(sacer)이라는 단어는 ‘성스러운’(경외, 순수)이라는 뜻과 ‘저주받은’(혐오, 오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2부 2장 2절 참조. [본문으로]
  3. “제 1 조,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 제 2 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권리를 보전함에 있다. 그 권리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의 저항 등이다. 제 3 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떠한 단체나 어떠한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유래하지 않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본문으로]
  4.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 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 주마.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야훼께서는 누가 카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주셨다. (창세기 4장 14-15절, 공동번역) [본문으로]
  5. 아감벤은 폰 유스티를 따라 정치와 경찰을 구분한다. 정치는 적들에 대한 투쟁인 반면, 경찰은 시민들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다. 아감벤은 국가사회주의의 우생학에서 정치와 경찰의 차이가 사라진다고 말한다.(281-282) [본문으로]
  6. 형법 전문가 빈딩은 안락사에 대한 최종결정권이 “의사, 정신과의사, 판사로 구성된 국가위원회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환자 본인과 가족은 ‘요구’의 권한만을 가진다.(268) [본문으로]
  7. 홉스는 인간이 ‘서로에게 동일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사람을 죽이는 일’로부터 인간의 본래적 평등을 논하는데, 아감벤은 이 부분을 인용하여 리바이어던을 벌거벗은 삶으로 재해석한다. [본문으로]
  8. 『목적 없는 수단』 제1부 제1장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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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전복에 관한 테제

지필묵 2010. 2. 5. 05:13

우리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뛰어넘어 조건 없는 보장소득으로 나아가야한다. 그것은 ‘기본 basic’이라는 한계에 대한 도전이다. ‘기본’은 물질적 부(현금/현물이라는 특정 형태의 부)를 평등하게(개별적으로) 분배하기 위해 설정된 기준이며, 따라서 한계로서의 ‘기본’은 항상 ‘최소한 minimum’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한정된 자원과 무한한 욕망’이라는 근대적인 정치경제학적 전제가 견고히 자리하고 있다. 이때 한정된 자원은 측정가능한 부를, 무한한 욕망은 결핍에 의한 욕망을 가리킨다. 그러나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오늘날 이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이제 자원과 욕망은 '측정불가능한 부와 창조로서의 욕망'이 갖는 헤게모니로 재해석되어야한다. 

우리는 비물질적 부에 주목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적어도 비물질적 부에는 ‘최소한’이 적용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비물질적 부 - 지식, 정보, 소통, 정동 등에 기반한 비물질적 생산물들 - 는 1일 권장 칼로리와 같은 수치로 환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술을 통해 무한복제가 가능하다. 즉 비물질적 부에 대한 요구는 소유권이 아니라 접근권을 주장하는 것이며, 비물질적 생산이 헤게모니를 갖는 오늘날 이것은 곧 생산수단의 재전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비물질적 부의 사유화를 강화하는 모든 디지털 엔클로저에 저항해야하며, 일정량의 물질적 부뿐만 아니라 비물질적 부에 대한 무조건적 접근 역시 보장소득으로서 쟁취해야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각종 경계를 부숨으로써 더 많은 소통과 더 많은 협력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유용한 것들을 마음껏 창조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보장소득은 개체의 재생산에 머물지 않고 소통과 협력의 재생산에 복무할 때에만 공통적 common 차원을 구축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의 구축은 보장소득이 낳는 결과가 아니라 보장소득운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기획이다. 보장소득운동은 ‘운동들의 운동’, 즉 온갖 정체성과 이해관계가 극복되는 특이성들의 공통화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생산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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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I 세미나]『VOL』2호 좌담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중 일부 번역

지필묵 2010. 1. 26. 22:11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 기본소득, 그 기초개념
*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 노동과 가치형성 - ‘척도’에 대한 물음
* 국가와 돈
* 다시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좌담 : 山森 亮(야마모리 토오루) + 萱野稔人(카야노 토시히또), 酒井隆史(사카이 타카시), 渋谷 望(시부야 노조무), 白石嘉治(시라이시 요시하루),田崎英明(타자키 히데아키) 

역자 : 그라쪼 



노동과 가치형성 - ‘척도’에 대한 물음

타자키 : 
기본소득 논의에서 중요한 논점 중 하나로 온정주의[paternalism] 비판이 있죠. 일본에서는 성실히 일하는 것, 즉 생활보호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논의의 전제가 되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보호의 수급자격자에 대한 판단기준에도 ‘좋은 시민인가 아닌가’가 전제로 있습니다. 온정주의 비판이란 결국, 자신이 생활보호로 받은 돈을 어떻게 쓰든 상관없지 않냐, 그 돈으로 어떤 식으로 살든 상관없지 않냐 라는 태도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까지 포함되는데요. 『VOL』의 관심에서 말하자면, 노동과 수입이 연동되어있는 이미지를 얼마나 끊을 수 있을지 입니다. 
가령 작년에 골드만삭스 재팬 CEO의 보너스가 63억엔, 사원 전원의 평균이 7300만엔이나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한편 인류 중 15억명은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하고 있고요. 이것은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에서 말하듯이 노동과 그 대가로서의 수입 사이의 ‘척도’라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증거죠. 그래서 우리는 거꾸로 그와 같은 척도를 무시하고 소득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카이:
부의 형성에 노동이 하는 역할이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현저히 저하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지식자본주의론 등, 비교적 여러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노동시간이 구체적인 척도로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노동력의 사회적 평균으로서의 지출이라 할지라도 노동과 가치가 측정가능한 방식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것 자체가 원래 환상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그 모순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앙드레 고르는 이전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경우 완전고용을 어느정도 실현함으로써 물리적으로 그것을 관리해왔지만 지금은 그와 같은 형태로 고용을 보장할 수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점점 감소해감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유일한 루트로서의 부의 창구로 삼는다면, 예를 들어 ‘고용창출’ 이데올로기에 따라 ‘비생산적 노동’인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써비스노동을 증식시킴으로써 일부 부자들의 재산이 ‘머슴살이노동’을 통해 배분되는 식의 가난을 가져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르는, 이제부터 ‘일하는 만큼 대가를 얻는다’라는 담론이 점점 물질적 기초를 결여하며 이데올로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죠. 확실히 ‘니트족’을 둘러싼 논의나 ‘설교’를 듣고 있다는 느낌, ‘완전고용’을 전제한 정신론(精神論)이 분출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부의 생산과 노동의 연결이 느슨해진다는 것은 자유시간의 증대를 가능성으로 갖고 있다는 뜻이기에, 고르는 [기본소득을] 시간단축과의 조합 속에서 구상하고 있습니다. 네그리가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현재의 빈곤, 가능한 것으로서의 부』(Misères du présent, richesses du possible d’André Gorz, 1997)라는 제목의 저작은 그 점을 말하고 있죠.
  이와 같은 고르의 담론에 대한 오뻬라이스모 계열의 비판은, 무엇보다도 ‘머슴살이노동’[=써비스노동]을 ‘비생산적 노동’으로 포착하는 고전경제학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고 있는 점에 맞춰져 있습니다. 고르는 『요강』(맑스)의 일반지성론 등도 활용하고 있으나, 포스트포드주의 단계에서 새롭게 지배적 지위를 점하는 비물질노동의 성격을 왜곡하고 있으며 점점 무의미해질 고전경제학적 범주에 의존하고 맙니다. 그 점이 그의 기본소득과 시간단축의 조합이라는 구상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데요.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최근작 『비물질』(L'immaterial : Connaissance, valeur et capital, 2003)에서 고르 나름의 응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시부야 :
노동이 하는 역할의 저하라는 점에서 말하면, 최근 노동이 ‘아르바이트화’되고 있는 측면이 있죠. 이것은 워크페어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마이클 무어가 <볼링 포 컬럼바인>에서 워크페어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제 노동이 일벌백계처럼 되고 있어요. 생활보호 자격조건으로 자기 집에서 엄청나게 먼 곳에 직장을 두고 고생하는 대가로 생활보호를 받아도 좋다, 그게 싫으면 생활보호 받지 마, 라는 식이죠. 그래서 노동이 징벌과 같은 것이 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카야노 :
복종의 증거와도 같은 노동. 온정주의에는 그런 점이 있네요. 복종하면 그 대가로 생활을 돌봐준다는 점이요.

시부야 :
기본소득와 워크페어는 사실 굉장히 가깝다는 느낌이 듭니다. 생존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는 상당히 가깝고, 그래서 거기에 조건을 붙이느냐 붙이지 않느냐가 중요한 차이인 것이죠. 그 차이를 묻고 있는 게 아닐까요.
  
사카이 :
포스트 웰페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기반, 동일한 조건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깝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워크페어는 웰페어가 무의식의 기반으로 갖고 있던 노동(취직)과 소득(복지)의 연결이 물질적으로 단절됐을 때 의식상으로 그것을 연결하고자 한 시도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텐데요. 예를 들어 조건이 붙는 기본소득인 참가소득이 그 일종이죠. 기본소득의 무조건성을 억누르고, 공인된 직업훈련이나 교육을 받는 것이라든지, 어린이·고령자·장애인을 돌보는 것, 자원봉사활동에 참가하는 것 등 조건을 부여해 그 대가로 소득을 보장하려는 아이디어입니다. 이것은 워크페어와 기본소득을 연결하는 방식인데, 이것을 무조건적 기본소득에 대한 이행기로 위치 짓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더군요. 
지금 워크페어에서의 노동의 징벌성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만, 그와 관련하여 코바야시 하야토씨가 이번 호에 뉴욕의 워크페어 사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입니다. 실업보험 급여자격으로 자신의 노동력이나 인적 자본으로서의 숙련[skill-up]이 의무로 지워지기 마련인데, 그 의무 지워진 노동에는 도무지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실질적인 취직가능성이나 소득가능성과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 거의 알 수 없는 상황이어도 어쨌든 살아있으니 노동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상식’을 계속 보여줄 것을 강요받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소득과 노동이 단절되어있는 상황을 관념으로 메우는 효과가 이런 신체규율이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카야노 :
온정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기본소득 논의가 있다, 이건 정말 맞는 말이에요. 착각하기 쉽지만, 민중의 생활에 대한 보장을 공적으로 행하는 것이 그대로 공권력의 강화로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요. 라짜라또도 이번에 번역된 논문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생활보장이 온정주의로 행해지기 때문에 바로 공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생활을 보장받을 ‘자격’이 얼마나 있는가, 얼마나 순종하며 얼마나 일할 의지가 있는가, 노동자로서의 능력은 얼마나 있는가, 얼마나 규율 있는 생활을 하는가, 국적이나 인종은 무엇인가 등등, 그런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권력장치가 발달하는데요. 그것이야말로 삶권력의 방식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적 생활보장을 목표로 하는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삶권력에 의해 성립되는 행정기구는 제거되고 또한 그로 인해 국가권력도 점점 축소될 것이라고 라짜라또는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지만, 다만 그런 논의의 전제가 되고 있는 인식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즉 ‘노동과 임금의 분리’라는 것을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으로서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카이씨도 아까 슬쩍 말씀하셨지만, 원래 자본주의에서는 노동과 가치가 연동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연동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은 자본주의에게 필요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연동되어있지 않음’으로부터 ‘자본주의는 이제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끌어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시부야 :
일본에서도 종전 직후에,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고려하는 마켓 바스켓 방식[각주:1]이라는 임금산출법이 노동자 쪽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는 사고방식과 크게 동떨어진 것입니다. 이후 임금이 노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는 환상은 오히려 경영자 쪽에서 능력급이라는 형태로 도입되었습니다만, 이제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카이 : 
오뻬라이스모가, 보통 전통적으로 맑스주의 이론의 핵심으로 생각되어온 노동가치론을 맑스 이론의 내부에서 가장 비판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1960년대인 대중노동자 시대에 노동가치론의 경제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며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남부에서 온 이주민인 불안정노동자들, 주변적 노동자들이 항상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이탈리아의 경험과 그것에 입각한 뜨론띠 이후의 『자본론』에 대한 ‘전복적’ 해석 - 자본축적과정을 노동자와 그 힘의 편에서 생각하는 - 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생산과 재생산,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맑스를 포함한 고전경제학의 기본적인 범주를 철저히 문제 삼을 수 있게 한 데도 그들의 기여가 큽니다. 일본에서 그 이론적 실험과 변천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네그리의 논의에서 노동가치론이 성립될 수 있는 때가 있다면 그것은 매뉴팩처 시대입니다. 얀 물리에 부땅 등은 노동가치론이 타당한 것은 노예제뿐이라고 말합니다. 맑스는 노예제를 자본주의의 전사(前史)로 위치 짓습니다만, 브로델이나 월러스틴의 역사학을 참조하면 그 인식도 바뀝니다. 노예제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 통합된 것입니다. 노동자의 재생산을 기축으로 하여 경제가 구성되는 것은, 노예주나 플랜터(planter)가 노예의 라이프 싸이클을 기초로 노예의 매매가격을 계산하는 플랜테이션 경제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문제제기를 요약하면, 실질적으로 가족임금이라는 형태라 하더라도 노동시간을 척도로 가치가 생기는 것처럼 관리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타자키 : 
노동을 시간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19세기적인 산업생산의 시기, 즉 가족임금이 아직 성립되지 않은 시대죠. 페미니즘의 대대적인 패배는 가족임금제에 의해 야기되었지만 그 가족임금제도 포스트포드주의 체제에서는 성립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명료화하면 좋을까요. 신자유주의의 가장 솔직한 대답은 ‘죽어’이지만(웃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연착륙할 수 있을까, 아니면 보다 과격한 빈자들의 응답을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문제겠죠.  

야마모리 :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는 것이 원래부터 허구였다는 말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네그리 등의 논의에서는 항상 ‘현재’가 문제되고 있어요. 최근 40년간 계속.(웃음)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에 초점이 있고 ‘지금 여기’에서 행동을 일으킬 이유에 대한 설득력을 갖고자 하기 때문에 최근의 자본축적방식의 변용 등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원래부터 허구였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고 있죠.
자 이제 척도가 없어졌다, 원래부터 척도 같은 건 없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한편으로 아무리 잠재적이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척도라는 게 있을 겁니다. 물론 지금까지 기능했던 척도를 모두가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이 현 상황이고, 최저임금으로 1일 8시간 주5일 일해도 먹고 살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 기본소득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척도를 기초로 최저임금인상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어야겠죠. 바로 그때 권력은 ‘화이트칼라 제외’라는 형태로 자신의 이해(利害)에 기초하여 척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시라이시 :
그러네요. 그래서 저는 먼저 ‘기본소득 도입하라’라는 구호의 효과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발상[concept]으로서 예시(豫示)적인 잠재력[potential]을 품고 있어요. 기본소득을 요구함으로써 현대 자본주의의 양상이 보이기도 하고 국가에 대한 요구사항이 차차 일어나기도 합니다. 감히 말하자면 기본소득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엿보도록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기본소득이라는 주장을 은폐하려는 힘도 움직이고 있는 거겠죠. 기본소득이라는 말만 해도 비웃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은 결국 관리와 생산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시부야 :
우리가 기본소득을 주장함으로써 적어도 행정 쪽이 그것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겁니다. 위정자들이 왜 기본소득이 무용한지를 증명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기초로 우리가 제도를 다시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증명을 우리가 짊어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최종적으로는 아마도 척도를 둘러싼 싸움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돈

시라이시 :
기본소득은 세밀하게 구축되어가는 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한 요구’로서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따라 현대 자본주의가 비물질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가, 또는 노동과 임금은 원래 대응되지 않았다와 같은 생각이 전망[perspective]으로 열립니다.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위정자들도 여러 가지로 꾸며낼 것이고 다양한 사회적 알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한 효과가 있을 거라고 봐요. 종래의 사회보장이라는 형태로 국가를 굴리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기본소득이라는 형태로 굴리는 것이 좋은가, 어느 쪽이 국가에 대한 요구로서 혹은 그 폭력에 대한 통제로서 알맞은가가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카야노씨의 국가론으로 말하자면, 국가는 폭력의 운동이며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국가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폭력에 대한 통제인 것이죠. 그리고 최근작 『돈과 폭력의 계보학』에서도 강조되고 있습니다만, 돈은 교환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징수 또는 찬탈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돈의 분배를 통해 폭력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복지국가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겠지만 그 정책적인 온정주의를 우회하지 않고 기본소득으로 폭력으로서의 국가의 운동을 통제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카야노 :
그렇죠. 국가권력의 원천은 폭력의 행사에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통해 폭력을 통제하는 것은 필연적인 물음이 되리라고 봅니다. 
저는 제 책에서, 돈에는 교환과는 별개의 기원과 기능이 있는 게 아닐까 지적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사고할 때 교환에 의해 자본주의가 성립되고 있다는 관점이 뿌리 깊게 있습니다만, 사실 교환 그 자체는 결코 자본주의를 낳지 못합니다. 그게 아니라 먼저 빼앗는 것과 빼앗기는 것의 관계가 있어요. 빼앗는 쪽이 권리관계를 억지로 짜맞춰서 여기는 나의 소유권이 미치는 곳이니까 여기서 일하는 놈들은 반드시 그 노동의 성과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없다, 그 성과는 모두 나의 것이다, 라는 형태로 돈을 가로챕니다. 이른바 시초축적의 구도죠. 돈은 그러한 권리관계를 폭력적으로 설정하는 것에 관계되어 있고, 역사적으로 말하면 어음이 그 구체적인 형태입니다.
맑스의 노동가치론이 새롭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치를 교환비율과 노동비율의 연동으로 사고하는 것을 그만두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본으로서의 가치의 원천은 교환이 얼마나 일어나는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소득이 제기하는 문제는 정말로 그 지점과 관련되어 있어요. 노동과 임금은 원래부터 연동되어 있지 않다. 특히 현재는 그것이 눈에 보여서 명백하니까요. 골드만삭스 보너스 이야기도 그렇지만, 미국 석유관련기업의 CEO도 막대한 보수를 얻고 있습니다. 옥시덴탈사(社) CEO는 250억엔 정도 받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죠. 단순하게 그 CEO가 연간 250일 일했다고 하면 하루에 1억엔을 번 게 됩니다.(웃음) 왜 미국의 석유관련기업 CEO가 그렇게 보수를 받게 되었냐면 이라크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그에 따라 기업의 주가도 상승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자본의 가치는 교환보다도 정치권력을 통한 수탈에 의해 생겨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사태가 점점 명백해지면, 결국 노동과 임금의 관계는 뭐냐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시라이시씨가 말씀하신 대로, 돈의 논리를 역이용해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기본소득을 위치 짓는 것이 중요해지겠죠. 가령 지금은 자본주의가 노동과 임금의 연결을 끊으려 하고 있습니다. 노동과 관계없이 보수를 받는 사람은 받고, 받지 못하는 사람은 받지 못하는 그런 사태를 강화하기 위해서죠. 기본소득은 그것을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노동과 임금이 연동되지 않으면 일하지 않고 돈을 받아도 되는 거잖아, 라고 말이죠. 

야마모리 :
노동가치론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관습, 즉 정치인 것이죠. 반복하게 되는데, 다만 어느 정도의 척도에 대한 감 같은 것은 지금도 공유되고 있는 게 사실이고 그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감각이나 요구 - 적어도 이 정도의 소득은 필요하다라든가 - 는 무시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복지는 조건부의 돈으로 국가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강요되는 척도에도 우리가 납득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있으니 그런 지점에서 이론을 세우는 것도 놓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척도가 허구라고 말하며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논의에서 척도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키 :
알랭 까이에 등은 복수경제라는 말을 씁니다. 즉 시장이나 국가에 의존하는 경제가 아닌 영역을 어떻게 만들고 그것을 얼마나 확장할 수 있는가. 노동시간이나 돈이 척도가 되는 세계가 아니라, 연대를 얼마나 높일 수 있는가가 척도가 되는 세계죠. 세계에는 복수의 척도가 있는데 그 중에서 노동시간이나 돈이라는 척도를 얼마나 축소할 수 있는가, 라는 거예요. 그때 기본소득도 화폐라는 매개를 사용은 하겠지만, 화폐 이외의 척도를 확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시도인 것입니다.
화폐는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끊는 메시아입니다. 즉 연대를 끊지 않으면 사람과 사람을 이을 수 없는 메시아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그럼 어째서 연대를 가치로 구축하고 확장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어떤 척도라도 다 팽개쳐버리고 싶지만(웃음), 현실적으로는 까이에가 말하듯 복수의 척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폐의 폭력’이라는 이야기에 대응해서 말하면, 기본소득은 그것을 중화하는 화폐의 분배방식인 것이죠. 예를 들어 빠올로 비르노는 포스트포드주의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인간의 활동의 구별, 특히 행위[action]과 노동(소비재생산으로서의 노동) 사이의 구별이 불가능해진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활동의 결과로 산출되는 것의 질이 아니라, 말하자면 수행[performance] 그 자체의 질에 대한 타자의 평가가 노동현장에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버립니다 . 빈곤층에게 워크페어, 일정한 수입이 있는 층에게는 ‘화이트칼라 제외’죠. 이것도 타자와의 연결이라는 의미에서는 연대일지로 모르지만, 그것이 돈이라는 척도에 종속되는 한 연대 그 자체에 대한 착취가 되어버립니다. 기본소득은 그런 사태를 회피하는 수단이 될지도 모릅니다.

카야노 :
이번 호에 게재된 코이즈미 요시유키씨의 인터뷰에서 재미있는 것은, 코이즈미씨가 일종의 영역[territory]을 만들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에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라고 말이죠. 가령 아픈 사람이라면 아픈 사람으로서 부에 접근할 영역을 가집니다. 이 경우 영역을 가진다는 것은, 자본주의 논리를 역이용하여 부에 접근하는 특권과 권능을 확립해가는 것입니다. 국가는 폭력에 접근하는 권리를 독점하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부에 접근시킬 권리를 둘러싼 운동으로 포착하면, 영역을 가진다는 사고방식은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원래 경제라는 것은 그런 영역=권한에 의해 성립된 것이니까요. 가령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부에 대한 권리가 신분으로 부여되었습니다. 어떤 신분으로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가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부에 접근할 수 있는가라는 권리와 연동되어 있었던 거예요.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 그 부에 대한 권리가 추상화되고, 등질적인 노동과 자본이 그 공통기반이 됩니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고 있듯이, 그에 따라 소유권도 구체적인 물건이나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서 권리 그 자체를 소유하는 것으로 추상화됩니다. 따라서 생각해야할 물음은, 자본주의 논리 앞에 어떻게 새로운 부에 대한 권리를 세워갈 수 있는가가 되겠죠.    

타자키 :
카야노씨의 테제는 재화에 접근할 권리창조의 근본이 곧 폭력의 제거라는 거군요.

카야노 :
그렇습니다. 물리적 힘의 행사가 없다면 인간의 활동영역 속에 권리관계가 설정되는 것 같은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부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세우고 보장해나갈까라는 물음은 필연적으로 정치권력을 어떤 것으로 변형해나갈까라는 사정거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야마모리 :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생활을 화폐경제에 푹 빠뜨리는 게 아닌가, 신자유주의의 극단이다, 라는 비판도 듣습니다. 기본소득의 유무에 관계없이 우리의 생활은 화폐경제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한에서 비판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금융자본에 의한 지배로부터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해방시킬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고, 그것과 기본소득이라는 주장을 제휴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고 봅니다. 전지구적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라는 점에서 말하면 ‘토빈세’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토빈세를 재원으로 삼을 수도 있겠죠. 


  1. 최저 생활비를 산정(算定)하는 방식의 하나. 생활에 필요한 최저한의 전소비 물자의 품목과 수량에다 그것의 구입 가격을 곱하여 필요 경비를 산출해 냄. 영국 노동당이 창안한 것으로, 임금 인상 요구 때의 임금 수준의 산정 따위에 널리 쓰임. (네이버 사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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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I 세미나] 곽노완,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

지필묵 2010. 1. 16. 09:16

■ 곽노완의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에 대한 리뷰


  곽노완의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은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발표된 것으로, “다양한 진보세력이 존경하며 연대하고 싶어하는 노동운동이 되기 위한 노동해방의 발본적인 새로운 방향성과 비전을 제안하기 위한” 글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노동운동의 위기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정규직노동자가 중심이 된 노조운동 및 노동운동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광범한 스펙트럼의 운동들이 노동운동의 중심성과 지도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것이 노동운동에 대한 비난이나 조롱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지만, 노동운동 역시 조건의 변화를 인정하고 중심성과 지도를 버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자에게 전통적 좌파의 노동운동과 신좌파의 사회운동이라는 구분은 노동과 노동해방에 대한 상이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동해방에 대해 전자는 “노동안에서의 해방”으로, 후자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사고한다. 노동에 대해 전자는 “노동이 모든 부의 유일한 원천이며 잉여가치 내지 이윤의 유일한 원천이 임노동에 대한 착취”라고 보는 반면, 후자는 “노동뿐만 아니라 지식을 포함한 모든 활동이 부의 주요한 원천이며, 모두가 사회적 부의 생산자이기 때문에 … 모두 착취를 당한다”고 본다. 그래서 저자는 부의 원천, 착취, 빼앗김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통합한 제3의 길을 제시한다. 맑스에게 빼앗김은 착취와 수탈이라는 두 가지 시공간을 갖는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빼앗김을 착취와 수탈의 결합으로 보는 저자에게 변혁의 주체 역시 빼앗기는 사람들, 즉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사람들 모두이다. 그리고 이들은 평등하다. 여기서 평등하다는 것은 변혁이 노동운동 아니면 신사회운동, 혹은 임금노동자 아니면 소수자들이라는 양자택일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 즉 ‘빼앗김’을 착취와 수탈로 개념적으로 구분한 뒤 분리된 것 두 가지를 결합하는 방식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유용한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시도는 착취에 대한 근대적인 정치경제학의 해석 - 노동가치론 - 에 근거하며, 그 틀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 즉 비임금노동의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수탈이라는 개념을 끌어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노동가치론의 틀을 삶의 전 영역으로 확장할 때 모든 생산은 가치의 생산인 동시에 착취의 대상이 된다. 빼앗김을 착취와 수탈로 구분하는 것은 일견 임금노동과 비임금노동을 모두 고려하는 것 같지만, ‘임금노동’(착취)과 ‘비임금노동’(비-착취)의 경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변혁의 주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양자택일에 대한 거부라면 이는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탈근대 정치철학의 조류 -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들뢰즈와 가따리 등 - 와 상통한다. 그러나 양자택일에 대한 거부는 “소수자들만이 변혁의 주역이거나 헤게모니를 갖는 것이 아니”며,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도 변혁의 주체”라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헤게모니에 대한 거부로 옮아간다. 이로써 저자는 생산과 운동에서 작동하는 헤게모니를 이론적으로 무력화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중심성’과 헤게모니를 혼동하는 데서 기인한다. 생산과 운동에서의 헤게모니는 압도적 비율이 아니라 ‘추동력’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적 소유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는 기본소득이 하나의 담론으로 제출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를, 즉 비물질적 생산에 사적 소유를 넘어설 - 공통적인 것을 구축할 -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저자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노동운동 변혁의 기획으로서의 기본소득’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과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한국형 기본소득 모델을 제시하는데, 특히 고용지대로 대부분의 재원을 마련하는 판 빠레이스의 모델을 비판하면서 한국형 모델을 강조한다. 저자가 설계한 한국형 모델은 “생산수단 및 토지의 사회적 공유로의 전환” 위에 “노동소득 + 사회연대소득/코뮌주의적 기본소득을 통한 능력에 따른 노동의 촉진”하는 모델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고타강령비판」에서 언급되는 노동성과에 따른 분배[코뮤니즘 1국면]와 각자의 필요에 따른 동일한 분배[코뮤니즘 2국면]의 결합이다. 
  이러한 절충은, 착취와 수탈의 결합과 노동운동과 신사회운동의 헤게모니 없는 단순결합이 고스란히 이어진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비판되어야 할 것은 두 국면의 절충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의 근거이다. 저자는 “‘필요에 따른 분배’ 원리는 경제적으로 지속불가능한 유토피아적 기획”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노동유인이 크게 감퇴하여 경제적 성과가 크게 감퇴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유인이 필요한 노동’이라는 관념을 유지하면서 노동해방을 - 노동 안에서의 해방이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든 - 이룰 수 있을까. 저자는 나아가 “헌신적인 사람들이 게으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에서보다 적어진 파이 중에서 더욱 많은 것을 빼앗기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충한다. 저자가 언급한 게으른 사람들/이기주의자들의 역설은 인간본성에 대한 홉스적 관념을 떠오르게 한다. (‘노동해방’을 말하는 홉스!) 이러한 생각으로라면 기본소득의 자주관리는 물론, 그로부터 시작될 공통적인 것의 구축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위험한’ 사람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제3의 매개에게 양도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결국 이 글은 노동해방과 기본소득운동을 말하고 있지만, 사적 소유에 대한 인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저자는 “기존의 경제성과 중에서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던 부분(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을 강조하면서 고용지대에 의존하는 판 빠레이스의 모델을 비판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비판의 지점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저자가 말하는 빼앗긴 것에 대한 환수운동은 사적 소유 일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특정한 사적 소유에 대한 거부에 그치고 말 것이다.    


* 사족
- ‘노동소득 + 기본소득’에서 노동소득은 고용(고용주+사업장)을 전제하므로 그것은 곧 임금이다. ‘임금에서 소득으로의 전환’은 ‘고용에서 자주관리로의 전환’과 연동할 때 더 강력해진다. 
-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국적 프레임들. 전지구적 기본소득의 기획은? 세계단일통화만큼이나 전지구적 시민권도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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