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필묵'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0.01.11 [UBI 세미나] 블라쉬케, 「당신의 목표는 임금노동의 노예?」 1
  2. 2010.01.03 자본과 언어 > 서문 : 노동에서의 언어
  3. 2009.12.15 사건의 정치학 > 1장 사건과 정치 > 5절 분포적 전체와 집합적 전체

[UBI 세미나] 블라쉬케, 「당신의 목표는 임금노동의 노예?」

지필묵 2010. 1. 11. 15:11


■ 로날트 블라쉬케의 「당신의 목표는 임금노동의 노예? : 라이너 로트의 ‘조건 없는 기본소득’ 비판에 대한 반비판」에 대한 리뷰


블라쉬케의 글은 제목처럼 로트의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하 기본소득) 비판에 대한 반비판이며, 로트가 지닌 경향은 크게 5가지 쟁점으로 다뤄지지만 결국 임금노동원리로 요약된다. 이는 좌파 안에서 여전히(어쩌면 오히려 더) 강고하게 작용하는, 기본소득 담론이 넘어서야할 대표적인 경향이다. 

  1. 곤궁함에 대한 심사(이하 심사) 
- 로트 : “기본소득 액수를 확정할 때 필요와 동시에 곤궁함이 조사되어야 한다”. 심사의 폐지는 결국 심사 주체가 지불당국에서 재정당국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심사에 대한 거부를 원하는 만큼 취할 수 있음을 의미할 텐데 일정한 액수로 제한되는 기본소득의 지불방식과 모순된다.
- 블라쉬케 : 세액사정과 기본소득 액수에 대한 사회적 토론 및 결정은 심사와 별개이며, 기본소득은 ‘원하는 만큼’을 주장하거나 보장하지 않는다.   

  2. 콤비임금[각주:1] 
- 로트 : 기본소득이 콤비임금이 되어 임금축소를 가져올 것이며, 노동자로 하여금 저임금노동을 수용하도록 만들 것이다.
- 블라쉬케 : 오히려 유리한 협상지위를 갖게 된다. 기본소득은 “임금의존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마음에도 없는 조건으로) 파는 생계적 필연성에서 해방되도록 하는 사회이전지출”이며, 탈상품화의 길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노동시간 단축 효과를 가진다.

  3. 노동강제 
- 블라쉬케 : 로트와 같은 논자들은 노동강제의 특정 형태만을 문제 삼지만, 기본소득은 모든 노동강제에 반대한다. 노동강제를 승인하면 노동을 거부하는 자는 “국가의 사회이전지출 중단이라는 처벌”을 받게 된다. 기본소득은 “돈을 위해 일시적으로 일하지 않을 혹은 아예 일하지 않을 결정의 자유”를 위한 것이며,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에서 생계에 근거한 노동강제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4. 최저임금
- 블라쉬케 : 로트는 충분한 법적 최저임금을 요구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종속적인 고용활동자를 위한 최저임금과 실업자를 위한 최저소득은 반자본주의적 접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임금노동자의 더 나은 지위”가 아니라 “임금노동관계와 자본관계를 근본적으로 넘어서고 따라서 소외를 지양하고자 하는 정치적 접근”이며 “그것은 인간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떤 조건 아래서 그들이 일하고자 하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활동조건과 생활조건을 추구한다.”

  5. 화폐
- 로트 : 기본소득의 특정 모델인 '생활금'은 자본가치증식 상태에 의존적인 분배이며, “자본가치증식의 산물로서 화폐가 증식하는 생산의 영역을 자본에 넘겨준다.”
- 블라쉬케 : 로트는 화폐를 사회적 관계들의 표현이 아니라, 불변하는 ‘사물’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들이,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생산하는 관계들이 변화되고, 그들의 역량과 생산물이 교환가치에 따라 상품으로 교환되지 않는다면, 지불수단, 즉 화폐 혹은 그밖에 그렇게 불리는 것 또한 완전히 다른 기능과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블라쉬케는 화폐의 성격 변화의 예로 ‘능력보수(fähigkeitsentgeltung)’를 들면서 기본소득의 가능성과 미래를 전망한다. 여기서 ‘능력’이란 “필요 노동생산 내에서의 의식적인 구성, 자유로운 협력, 포괄적인 자기결정의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평가”된다. 능력보수는 “사회적 필요노동 영역에서의 능력의 사용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목적으로서 따라서 사회적 필요노동영역 저편에 있는 자유로운 능력발전의 물질적 토대”이다. 그것은 “양적으로 따라서 노동시간 혹은 생산물 수/생산물 크기로 똑같은 정도로 점점 더 평가될 수 없는, 비물질적 재생산에서 획득되는 구성능력의 사용을 반영”한다. 그래서 앞으로 총소득은 (1)노동에 의존하지 않는 일반적인 기본소득 + (2)능력보수로서의 부가적인 노동보수로 구성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 기본소득은 생산을 '임금(wage)/교환가치'가 아니라 '소득(income)/사용가치'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기본소득 담론은 단순히 분배정의의 실현이나 사회안전망의 강화에 그치지 않는 탈근대적 생산 담론(삶정치적 생산)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 이 글에서 제시되는 기본소득의 핵심은 기초생활에 대한 보장이 아니라 그것이 낳는 효과, 즉 자기결정(주로 ‘생계를 위해 억지로 일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보장이다. 이로써 빈민구제책, 지속가능한 자본주의, 신케인즈주의 등과 완전히 결별한다. 그러나 노동거부 못지않게, 임금노동 외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창조적 생산활동에 대한 긍정이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 능력보수는 기본소득의 발전가능성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보수와 소득을 동의어로 보아도 무방한지와 ‘부가적인 노동보수’가 갖는 구체적인 의미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다. 내용상 능력보수는 기본소득에서 보장소득으로의 도약 가능성을 시사하는 듯하다. 

* 기본소득은 적어도 초기에는 국가에 의해 운영될 것이므로 많은 딜레마 - 시민권 등, 일국적 나아가 초국적 협치에 의해 관리되는 삶 - 에 놓일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당연하게도 ‘어떻게 아래로부터 운영할 것인가’이다. (히로세 쥰이 ‘운동을 통한 기본소득’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참고> 기본소득의 정의(블라쉬케) 
“기본소득은 (1)모든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속하고 보장되는, (2)(빈곤을 퇴치하고, 사회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생활(Existenz)을 보장하는 액수의, (3)곤궁함(Bedurftigkeit)에 대해 심사(소득심사/재산심사)하지 않는, (4)노동강제와 노동의무 및 활동강제와 활동의무가 없는, (5)국가에 의해 지불되는 기본소득이다. 그 이상의 소득은 따로 고려할 필요 없이 가능하다. … 기본소득은 시장의 결함을 고치려는 사회정책적 프로젝트가 아니가. 그것은 더 많은 자유, 민주주의, 인간존엄을 위한 프로젝트다. 그것은 기존사회 너머를 가리킨다.”
- (2) : ‘basic’의 근거. 보장소득과의 결정적 차이.  
- (3),(4) : ‘unconditional’의 근거.


  1. 혼합임금 (Kombilohn) : 저숙련 근로자들에게는 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해 근로의욕이 안 생기고, 고용주에게는 생산성 대비 임금인상이 힘든 상황인 저임금 분야의 일자리에 대해 정부가 일정부분 지원하여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것이다. (http://tong.nate.com/jykim9728/26030813 참조.) 블라쉬케는 콤비임금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1)보조금을 받는 노동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2)(최)저임금에 대한 보조금일 뿐이다. (3)임금해체와 사회(복지)해체가 조장된다’로 요약한다. [본문으로]
:

자본과 언어 > 서문 : 노동에서의 언어

지필묵 2010. 1. 3. 11:20

Christian Marazzi,『Capital and Language』

서문 : 노동에서의 언어 - Michael Hardt


# 아우또노미아와 ‘포스트 오뻬라이스모 post-workerist’적 관점
- 노동자 투쟁이 자본의 재구조화에 선행하며 그것을 미리 형상화한다.
- 그 재구조화는 노동자 권력에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공한다.

# “언어가 현대 자본주의적 경제의 기능과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모델을 제공한다”
- 금융세계는 언어적 관습으로 특징지어지고, 언어적 관습을 통해 기능한다.
- 노동의 새로운 지배적 형태는 언어를 통해, 그리고 언어적 수행과 유사한 수단을 통해 생산된다. 

# 마라찌는 금융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관점을 모두 거부한다. 
(1) 금융은 자기발생적 가치의 영역이 아니며, 인간노동과 생산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이지 않다. (신고전경제학, 통화주의 경제학 비판)
(2) 금융은 허구적인 가치들과 순수한 투자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며, ‘실물경제’에서 상대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맑스주의[경제학] 비판)  

# “현대 금융시장의 작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이론이 필요하다” 
(1) 금융은 자료와 정보의 지속적인 소통을 필요로 한다.
(2) 금융은 언어적 관습을 통해 기능한다. 연설행위(FRB 의장의 공표) + 일군의 신념과 언어적 관습들을 공유하는 연설 커뮤니티.
(3) 금융의 언어가 노동 및 생산과 연결되는 방식.

# 금융의 특수성은 노동의 미래 가치와 미래 생산성을 표상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 금융은 언어적 관계와의 유비에 있어 노동의 표현으로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 금융은 어떤 종류의 표상으로서 작용하는가.

# 노동과 생산의 새로운 지배적 형태들에서 언어의 역할은 훨씬 더 직접적이다.
- 오늘날의 경제(포스트포드주의, 공장 밖의 노동, 비물질노동)는 언어 및 언어적 능력의 중심성으로 특징지워진다.
- 노동이 언어적 수행으로 규정됨에 따라 어떻게 노동시간이 늘어났는가. =>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 노동과 삶의 구분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 노동은 사회적 삶을 생산하고 모든 사회적 삶은 노동에 놓인다.

# 일반지성에 대한 재정의 
- 일반지성은 맑스가 ‘지식, 특히 기술적·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주요한 생산적 힘이 되는가’, 그리고 ‘그 지식은 어떻게 고정자본인 기계로 굳어지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 오늘날 일반지성과 지식의 생산적 힘은 기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소통과 협력 속에도 있다. => (1)뇌, 언어적 능력, 상호작용하는 기술이 고정자본의 위치를 갖는다. (2)일반지성을 체현함으로써 자본주의적 통제에 대한 산노동의 자율성이 증가한다.

# 언어적 수단을 통하여 주요하게 기능하는, 금융과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의 절합 
- 오늘날 금융화와 금융메커니즘은 산업자본주의를 유효하게 하는 훈육적 수단이 아니라, 노동과 사회적 생산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 ‘유동성, 소통, 금융시장의 미래지향을 다중의 해방을 미리 형상화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다중 안에 있는 사회적 협력의 잠재적 자유와 자본주의적 통제에 대한 잠재적 자율성을 강조한다.



:

사건의 정치학 > 1장 사건과 정치 > 5절 분포적 전체와 집합적 전체

지필묵 2009. 12. 15. 07:01

# 실효화 effectuation
“사건/발명의 물질적 또는 신체적 차원의 구성”. 


# 응집체 aggrega
따르드가 개체를 이해하는 방식(= 네트워크). “발명의 사회적 실효화의 주축”이며, “서로 소지(所持 tenir)하는 모나드들의 다수다양성(多數多樣性 multiplicite)”. 특이성들의 공존방식. 


# 분포적/집합적
distributif/collectif (따르드) 
molculaire/molaire (들뢰즈&가따리)
tout/totalite (끌라스뜨르)

- 따르드에 의하면 하나의 응집체는 합성물. 다양한 존재가 서로 적응[원문 - 適合]하며 공존함으로써, 또는 다양한 존재가 공통의 기능을 통해 존재함으로써 성립. 응집체 = 적합체. 적합체는 끌어모음도 총화도 아님. 다양한 특이성으로서의 모나드가 체계적으로 코오디네이트된 것. 하나의 개체화, 발명, 사건.(66)

- 끌라스뜨르 식으로 말하자면, 분포적 전체로서의 "적합체"는 <여럿이 '있는' 하나 - 원시사회>로, 집합적 전체로서의 "끌어모음"과 "총화"는 <여럿이 '없는' 하나 - 근대국가>로 볼 수 있다. 라짜라또는 후자의 예로 헤겔-맑스주의적 전체, 뒤르껭의 전체, 정치철학적 전체를 든다. (여기서 "정치철학적 전체"는 (1)정치경제학의 오타 ㅡ,.ㅡ 이거나, (2)근대적 주류정치철학(국가-철학)인 듯..)

"하나라고 불리는 사물들이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불완전함의 사악한 영역에 빠져버린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그렇지만 단편의 문자가 요청하는 듯이 보이는 하나의 해석, 즉 Tout로서의 하나라는 해석은 제외시켜야 한다. 과라니족의 현자는 "모든 사물은 totalite 속에서 하나"라고 언명하지만, 이것은 그의 사고 속에는 없는 범주일 Tout를 명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사물" - 땅과 하늘, 물과 불, 동물과 식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 - 에는 하나[l'Un] 라는 불길한 각인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소멸하는 모든 것은 하나이다. 하나의 존재양식은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덧없는 것이다. (중략) 하나는 소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유한함의 기호이다. 인산의 세계를 불완전함과 부태 그리고 추함만을 내포하고 있을 따름이다. 사악한 대지의 또다른 이름은 추한 대지이다. 그것은 이우이 음바에메구아, 즉 죽음의 왕국이다.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과라니족의 사고는 말해주고 있다."

「여럿이 없는 "하나"에 대하여」,『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214-215 
 

(사족 : 역자는 Tout와 totalite를 모두 전체라고 번역했다. Tout를 '모두'라고 하면 어떨까..? '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