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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08 Defying Gravity from "Wicked" (Royal Variety Performance) 2
  2. 2010.08.26 William Blake's "The Tyger"
  3. 2010.08.19 "도끼로 뿌리를 치자"
  4. 2010.08.10 Michael Hardt, "Politics of the Common" 노트 4
  5. 2010.06.01 마틴 루터 킹, "우리가 기다릴 수 없는 이유" 5
  6. 2010.05.18 우백님께
  7. 2010.04.25 [번역] Manifesto: occupation at the University of Puerto Rico (korean translation) 4
  8. 2010.04.23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 1
  9. 2010.04.20 <Commonwealth> 3.1.3 "삶정치적 생산과 통제의 위기" 논의의 틀
  10. 2010.04.12 [번역] NO! G8 Action 리플렛

Defying Gravity from "Wicked" (Royal Variety Performance)

흥얼흥얼 2010. 9. 8. 05:05


It's time to trust my instincts,
Close my eyes...
And leap...!






Everyone deserves the chance to fly!


:

William Blake's "The Tyger"

리토르넬로 2010. 8. 26. 01:41




Arthur Quiller-Couch, ed. 1919. The Oxford Book of English Verse: 1250–1900.
  
William Blake. 1757–1827
  
489. The Tiger
  
TIGER, tiger, burning bright  
In the forests of the night,  
What immortal hand or eye  
Could frame thy fearful symmetry?  
 
In what distant deeps or skies          5
Burnt the fire of thine eyes?  
On what wings dare he aspire?  
What the hand dare seize the fire?  
 
And what shoulder and what art  
Could twist the sinews of thy heart?   10
And when thy heart began to beat,  
What dread hand and what dread feet?  
 
What the hammer? what the chain?  
In what furnace was thy brain?  
What the anvil? What dread grasp   15
Dare its deadly terrors clasp?  
 
When the stars threw down their spears,  
And water'd heaven with their tears,  
Did He smile His work to see?  
Did He who made the lamb make thee?   20
 
Tiger, tiger, burning bright  
In the forests of the night,  
What immortal hand or eye  
Dare frame thy fearful symmetry?  




:

"도끼로 뿌리를 치자"

NUDA POTENZA 2010. 8. 19. 02:31


"뿌리를 끊는 도끼"는 장작 패는 사람들과 물 긷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말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왔는데, 여기서 이 말은 세례요한이 계급적 오만을 향하여 퍼붓는 저주의 일부이다. 이 말은 또한 메시아와 불에 의한 세례에 대한 그의 고지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어구는 영국혁명에서 기꺼이 전유되었는데, 예를 들어서 지체 높은 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부를 빈자들에게 내놓으라고 명령한 아비저 콥은 그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도끼로 나무의 뿌리를 끊음"으로써 답했다. 세례요한의 혁명적 의미들과 "뿌리를 끊는 도끼"는 1790년대에 대서양의 양쪽에서, 복음주의자들과 세속적인 급진주의자들 모두에게서 부활되었다. 
(『히드라』, 474쪽)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장 7-12절



왕들, 사제들, 정치가들로부터 전쟁은 생겼다.
이들의 안전이 인간의 깊은, 덜어지지 않는 슬픔이고
이들의 화려함이 인간의 격하이다. 도끼로
뿌리를 치자, 독나무가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 독기운이 든 날숨이 
멸망, 죽음, 슬픔을 퍼뜨리는 곳에, 수백만 명이
뱀의 기근을 해소해주고 있으며, 그들의 뼈들이
독바람 속에서 묻히지 않은 채 바래가고 있는 곳에
정원이 세워지리라, 예쁘기가
이야기에 나오는 에덴을 능가하는. 

- Percy Bysshe Shelley, Queen Mab
(『히드라』, 475쪽)
 



:

Michael Hardt, "Politics of the Common" 노트

지필묵 2010. 8. 10. 03:05

Politics of the Common
By Michael Hardt, July 6th, 2009
[Contribution to the Reimagining Society Project hosted by ZCommunications]


- 공통의 부에 대한 대안적 운영(management)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공통적인 것은 두 가지 모습을 띤다. 생태학적/자연적 형태(이하 NC)와 사회·경제적/인공적 형태(이하 AC).

- 저항과 운동(activism)의 관점에서 두 가지 형태의 관계를 고찰해보자.
- 양자는 동일한 논리를 따르는데, 그것은 소유관계를 거부하며 그에 의해 약화된다는 점에 있다. 나아가 양자는 경제적 가치의 전통적 척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 대신 유일하게 유효한 가치화의 척도(scale), 즉 ‘삶의 가치’를 부과한다.
- 양자의 분할은 삶정치적 관점에서 흐려진다.

- 양자가 상반된 논리를 따르는 경우가 있다. 
  (1) NC가 보존과 한계에 주목한다면, AC는 창조, 개방성, 무한성에 주목한다.
  (2) NC가 인간/동물세계보다 더 넓은 이해관계의 장을 갖는다면, AC는 인류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 양자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순적 관계가 아니라 잠재적인 보완물이다. [UN기후회담을 둘러싼 행동들]

- 삶정치적 생산의 전제
  (1) 생산의 중심성[헤게모니]이란 생산의 다른 부문에, 그리고 사회적 삶에 부과된다는 점에 있다. 즉, 과거에 산업생산이 중심성을 가진 것은 그것이 산업‘경제’만이 아니라 산업‘사회’를 창조했다는 데 있다.
  (2) 이제 산업생산은 더 이상 위계적 위치를 점하지 않는다. 즉, 다른 부문들과 사회 전체에 부과되지 않는다.
  (3) 이제 중심성은 비물질적 생산에 있다. 인지적·정동적 도구들, 임금관계의 불안정하고 비보장적인 성격, 비물질적 생산의 시간성(노동일 개념의 파괴).

- 이러한 생산은 ‘삶정치적’이다. 생산이 ‘삶정치적’이라는 것은 생산이 궁극적으로 사회적 관계들과 삶 형태를 생산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삶정치적 생산에서는 생산/재생산의 구분이 사라진다. 
- 이것은 생태학적 담론과 삶정치적 생산의 근접성을 보여준다. 양자 모두 삶 형태의 생산/재생산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양자의 중요한 차이는, 생태학적 관점의 경우 ‘삶 형태’에 대한 생각을 인간/동물에 제한시키지 않고 더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 재산형태의 위계 : 산업생산 이전 시대에는 이동불가능한 재산 중심이었던 반면, 산업생산 시대에는 이동가능한 재산 중심, 즉 상품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비물질적 재산이 물질적 재산을 지배한다. 비물질적 재산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은 비물질적 생산의 중심성이 높아짐을 증명한다.

- 전산업생산에서 산업생산으로의 이행에서는 이동성이 중요했던 반면, 산업생산에서 삶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에서는 배타성(exclutivity)과 재생산성(reproductivity)이 중요해진다. 삶정치적 생산에는 (1)희소성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고, (2)무제한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하며, (3)개방적으로 공유되더라도 유용성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잠재력이 높아진다.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
  (1) 지배적인 형태로 출현하는 생산형태는 일반적으로 비물질적/삶정치적 재화로 귀결되는데, 이것은 공통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적이고 재생산 가능하며 점점 배타적 통제가 어려워진다.
  (2) 미래의 경제발전에 있어 그러한 재화들의 생산성은 공통적이 되는 데 의존한다. 사적인 것으로 유지시키는 것은 새로운 것의 생산에 무익하며 그것을 저해한다. 자본은 (역설적으로) 점점 공통적인 것에 의존한다.

<공통적인 것의 두 가지 논리적 특징>
  (1) 소유관계를 거부하고 그것에 의해 약화된다.
- 비물질적 소유형태는 배타적 권리를 지키기 어려우며, 사적인 것으로 만들면 생산성이 떨어진다. 
- 생산의 핵심에서 강력한 모순이 출현하는데, 그것은 생산성을 위한 공통적인 것과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한 사적인 것의 충돌이다. 
- NC 역시 소유관계를 거부한다. 환경적 효과들(그것이 이로운 것이든 해로운 것이든)은 항상 소유관계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유관계에 의해 약화된다. 축적의 사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피해는 사회적(보편적)이다. => 생산의 공통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사적 성격 사이의 갈등. [볼리비아 물․가스 투쟁]
  (2) 지배적인 가치척도를 초과한다.
-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외부성”. 회계사들이 말하는 “무형자산”.
- 가치척도를 초과한다는 것은 양적 초과가 아니라 척도체계 자체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 삶정치적 재화의 가치화에서 금융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생산의 새로운 지배적 형태들을 포착하는 데 무능하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 오늘날 경제적 재화와 활동의 가치가 전통적 척도를 초과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 생산에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 NC 역시 측정불가능하며 척도에 순응하지 않는다. 온난화나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파괴된 삶 형태의 가치는 측정불가능하다. 교토의정서 등 각종 협약들은 공통적인 것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측정하지 못한다. 다만 아주 간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해치고 부패시키는 가스의 생산에 화폐적 가치를 할당할 뿐이다. => 삶 형태는 측정불가능하다. 아마도 그것은 삶의 가치에 기반한, 근본적으로 다른 척도를 따를 것이다. 이것은 창안되어야 한다.

-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들이 모두 소유관계에 저항하듯, 양자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전통적 척도를 거부한다. 양자가 공유하는 특질들은 자율을 위한 정치적 행동과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운영을 연결시키는 데 토대를 구성한다.

- 공통적인 것의 정치
(1) NC : 희소성과 한계에 관한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아주 많은 사람들을 지속(생존)시키면서도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재생산된다.(The common can only sustain so many people, for instance, and still be successfully reproduced.) 지구, 특히 야생의 공간은 산업적 발전과 여타의 인간행위들이 주는 피해에 맞서 지켜져야 한다. <보존과 한계>
(2) AC : 생산의 무제한적 성격을 강조한다. 아이디어, 정동 등을 포함한 삶 형태의 생산에 고정된 한계란 없다. 물론 그것은 더 많은 아이디어가 반드시 더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희소성의 논리 하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제한 없는 창조적 잠재력>

- 공통적인 것을 위한 투쟁들 사이에 있는 기본적 갈등들
(1) NC는 발전에 반대하고 AC는 발전에 찬성한다? : 이것은 너무 단순한 관점이다. 두 경우에서 다뤄지는 발전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즉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생산과 관련된 발전은 산업적 발전과 분리되기 때문이다.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전통적 분할이 붕괴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나면, <보존>에 대한 요구와 <창조>에 대한 요구가 반대되지 않고 상보적임을 더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인간의 이해관계가 준거틀이 될 경우 : AC는 인류의 이해관계를 중시하지만, NC는 인류를 넘어 생태 전체(비-인간의 이해관계까지)를 다룬다.

메모 : NC를 사고할 때 필요한 관점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이다. NC의 영역에서 강조되는 <보존>은 접근 금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인위적 보존(가령 그린벨트)이 아니라, NC의 자기재생산 능력의 보존이다. 산업생산과 다른 접근, NC의 자기재생산 능력을 해치지 않는 공통적 접근이 필요하다.[성미산투쟁] 이것은 바꿔 말하면 ‘인류를 위해 자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가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가’라는 관점이다. 

- 이러한 차이는 넘어설 수 없거나 파괴적인 차이가 아니다. 이것은 운동에서나 이론에서나 양자에게 이롭다. 지구의 한계와 다른 삶 형태(비-인간 영역)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대면하는 것이 사회적 투쟁에 집중하는 이들에게 유익하듯, 사회적 위계의 성격과 그 위계와 싸울 수단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대면하는 것은 환경에 집중하는 이들에게 유익하다.

-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정치가 직면하고 있는 몇몇 핵심쟁점들을 명명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 공통적인 것을 놓고 투쟁하는 것과 그것을 운영할 대안적 수단들을 창안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를 재구상하는 기획에 있어 근본적이다.
- 공통적인 것의 두 측면의 분기와 차이들은 절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차이 자체는 건강하며 우리를 전진시킨다.
- UN기후회담에 주목. 환경운동가, 반자본주의운동, 다른 사회운동들의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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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우리가 기다릴 수 없는 이유"

지필묵 2010. 6. 1. 01:46


성문종합영어를 보면서 울컥하게 될 줄이야.. 



인종차별의 날카로운 화살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기다려"라고 말하기 쉬울 겁니다.

그러나 악랄한 군중들이 당신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제멋대로 린치를 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그리고 당신의 형제 자매들을 마음대로 익사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혐오에 찬 경찰이 당신의 흑인 형제 자매들을 저주하고 발로 차고 폭행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의 여섯살짜리 딸에게 방금 TV에서 광고한 공공놀이공원에 왜 갈 수 없는지를 설명하려고 할 때 갑자기 혀가 꼬이고 말을 더듬게 되는 걸 느낀다면, 유색어린이들은 "놀이동산"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딸의 조그만 눈에 눈물이 솟는 것을 본다면, 딸의 어린 마음의 하늘에 열등감이라는 우울한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면, 그리고 딸이 무의식적으로 자라나는 백인에 대한 원한으로 자신의 어린 인격을 망가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면, 
"백인", "유색인"이라고 적힌 성가신 표시에 날마다 굴욕을 당한다면,
계속 발끝으로 선 채로 살면서 당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에 낮에는 괴롭힘당하고 밤에는 망령에 쫓긴다면,
당신이 타락한 의미에서의 "보잘것없음"과 영원히 싸우고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왜 우리가 기다리기 어려운지를 이해할 겁니다.  


- 마틴 루터 킹, "우리가 기다릴 수 없는 이유"



 

:

우백님께

NUDA POTENZA 2010. 5. 18. 13:22

2009년 5월 20일에 쓴 글(http://blog.naver.com/irreducible/70031134906)을 옮겨놓는다.


우백님.. 늦었네요. 
1주기가 지났는데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댓글로 대신합니다. 
면식도 없는 제가 너무 친한 척 해서 부담스러우신가요? ^-^
당신이 저 너머로 가신 5월 16일, 전 용산에 있었습니다. 
대전에서는 한판 큰 싸움이 벌어졌구요.

국가권력에 의한 타살과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 
산업재해는 이제 삶-재해가 되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네요.
재해가 더 이상 작업장에서만 일어나는 특수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감싸고 꽁꽁 동여매는 보쌈주머니 같다는 느낌이에요.

하지만 삶에 대한 욕망, 존엄에 대한 의지는 여전합니다.
아니, 그건 여전한 게 아니라 영원한 것이죠.
당신이 생계에 대한 염려를 잠시 내려놓고 이라크를 생각할 때,
사측의 부당한 지시에 대한 거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
바로 그'때' 바로 그 '순간'이 지금도 영원한 것처럼 말예요.

우백님과 드물지만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합니다. 
또 뵐게요.


:

[번역] Manifesto: occupation at the University of Puerto Rico (korean translation)

지필묵 2010. 4. 25. 03:29


푸에르토리코 대학 점거 선언문




인문학부는 당신의 것이자, 그/녀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참여와 협력으로 가득찬 활발하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자. 경쟁과 우려라는 국가 및 행정부의 태도를 바꾸고 협력, 열정, 젊음의 환희로 대체하자. 

현존하는 권력구조들이 이미 균열을 일으켰고 자신의 안티휴머니스트적 의제들을 드러내었으니, 현재와 미래는 사랑과 행동에 대한 호소로 채워져야할 것이다. 우리의 학문공간들은 권력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며, 그것은 해방의 도구로서 환수되어야 한다. 휴머니스트들인 우리는 모든 종류의 가능한 세계들을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다. 이 가능한 세계들을 현실로 바꿀 때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고자, 우리를 분리시키고 소외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떨쳐내고자 학부를 점거하고 있다. 그러한 죽음 대신 우리는 우리 입에 채워진 재갈을 벗어버리기로,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형성되었음을 세계에 알리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생각하고 성찰하고 비판하는 다중이다. 우리는 심장박동이 주먹과 입맞춤의 상호작용으로 다져진 세대이다. 

이것은 대학을 지키자는 호소가 아니라, 수평적이며 위계적이지 않은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새로운 어떤 것으로 다시금 의미를 부여하자는 호소이다. 

우리의 행동은 다양함에 대한 호소이며, 우리의 교육공간을 정의하는 복수성에 대한 호소이다. 그것은 새롭고 상이한 세계들, 나라들, 도시들, 다중들, 공간들에 기여하는 모든 유형의 풍부한 지식 전체이다. 


우리는 위기와 주변화의 자녀이며, 억압과 약탈의 경제체제의 자녀이다. 우리는 참여를 비난하고 위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정치체제의 후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권리들을 위한 길을 개척한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 절멸에 직면해있는 그 혜택들을 위해 땀과 피를 지불한 사람들의 기나긴 전통의 계승자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이 우리가 세우고자 노력해온 것을 갖도록 푸에르토리코 대학을 탈환하는 중이다. 그것은 지식의 다양성,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그리고 우리가 창조하기로 선택하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관점들의 다양성이다.

국가와 대학 행정부가 공유하고 있는 재정적 집착은 교육을 소비재의 생산라인으로 생각한다. 인문학은 생산라인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기적 임금인상에 따른 제거대상이 되었다. 

인문학이 제공하는 것이자 국가와 대학 행정부가 무시하기로 한 것은, 비판적으로 될 기회,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할 기회, 소리·색깔·퍼포먼스의 세계에 형태를 부여할 기회, 우리의 말과는 다른 말로 쓰여질 기회이다. 교육은 자본의 좁은 시선이나 시장의 변덕스런 기분을 통해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교육은 고분고분한 주체와 무비판적인 자동기계를 재생산할 뿐이다.

그 기계를 부셔버리자!

우리는 교수와 학생 간의 협력적 유대 속에서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낳는, 해방적이고 유익한 교육을 제안한다.

우리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 즉 가르치는 사람들과 배우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교육을 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동사[가르치다, 배우다]를 선생과 학생에게 부과된 역할과 혼동하지 말자. 그것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교육은 써발턴과 주변화된 사람들을 학문의 주체로 포함해야 한다. 이주민,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여성, 남성, 나이가 많은/적은 사람. 


이러한 참여적·민주적 교육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학문과 그 주체들 간의 강한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연대는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으로가 아니라, 옆에서 구축된다.

옆사람을 안아주고 그/녀의 귓가에 당신이 그들의 존재를 긍정하며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이라.

상상과 변화의 결실을 낳을 기름진 토양에 내린 뿌리들처럼 우리의 몸을 서로 뒤얽자.


우리 손으로 존엄과 존중의 풍경을 그리자.

걱정하지만 말고 옆에 서라! 점거하라! 


http://emancipating-education-for-all.org/manifesto_upr_en

twitter @ISM030


: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

NUDA POTENZA 2010. 4. 23. 03:25


기본소득 블로그 선언


이 도시에 남은 것은 성장주의 체제와 그를 보호하기 위한 과시적 통치 뿐이다. 이 나라의 모든 도시는 외환위기와 금융자본주의의 과도기를 지나며 저마다 상표가 붙여졌고, 모든 공기업은 공공성이 아닌 매출액으로 평가받고 있다. 모든 개인의 주거권, 사회권, 참정권은 물론이고 목숨 그 자체마저도 손익률에 기준해 평가되는 지금, 모든 도시민 역시 성장연합의 상업적 소유품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수탈 체제는 모든 사회공공성을 파괴하고 개인의 삶마저 갉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탈당하는 것은 현재와 과거 뿐만이 아니다. 고작 1년 동안, 10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금융채무자라는 굴레를 덮어썼다. 우리의 미래는 점점 더 빠르게 수탈당하고 있다. 아비규환의 땅 위에서 정권은 이 나라가 선진국의 국격을 이룩했다며 축배를 들고, 우리가 쌓아올린 것은 언제나 우리의 것이 아니다. 가당치 않게도 민주공화국이란 상표로 포장된 이 나라에서, 우리는 정치경제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모두는 오로지 자산이고, 자원이며, 상품일 뿐이다. 

생계를 잇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쌓여가는데도 지배자들은 우리에게 더 양보할 것을 요구한다. 파업하지 말고, 투쟁하지 말고, 노동조합조차 만들지 말고, 눈을 낮추고, 일하라고 외친다. 그러나 우리에겐 일할 자리도 없다. 

그들은 이제 우리에게 어떠한 공공재도, 어떠한 자연적 유산도 허락하지 않는다. 교통과 역사를 자본에게 넘겨주고, 강과 산을 개발산업에게 제물로 바치고, 급기야 사람마저도 생산하려 든다. 자녀를 생산하지 않은 게으른 부모에겐 복지를 제한하고, 지하철 역사에는 자녀를 많이 생산하지 않은 자를 죄인으로 묘사하는 광고를 붙이고 있다. 우리에겐 사회권도, 주권도, 생존권도, 그 어떠한 인격도 없다. 경제적으로 배제된 모든 이들은 인간사회로부터도 배제되었다.

봉쇄된 권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배제된 인격에게는 등가교환의 시장적 권리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법과 원칙’이라는 칼날을 들이대지만, 있는 자는 법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지난해 정권에 의해 단행된 이건희의 단독특별사면은 만인이 법 앞에 불평등하다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을 역사에 각인했다. 만민의 자유를 탈취한 자들은 스스로에게 자유주의라는 기만적 명분을 휘장 삼아 두른다. 그 휘장 아래에서 빈민의 자유는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사상의 자유는 법적으로도 통제당한다. 그들은 심지어 자유를 위해 국가보안법을 지키자고 주장한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자유는 지배할 자유이며, 착취할 자유이고, 수탈할 자유다. 피지배자의 자유가 원천적으로 통제당하는 그들만의 사회에서, 물질적으로 독립되지 않은 그 어떤 누구도 법의 주인이, 국가의 주인이, 사회의 주인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법의 주인, 국가의 주인, 사회의 주인, 자신의 주인이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같은 공화국의 국민이기에.

공화적 자유는 타인의 지배와 간섭 위에서는 보편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사회의 오랜 역사가 이를 실증해 왔고, 오늘날 정권이 노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용산 남일당에 몽둥이와 방패를 들고 난입한 경찰과 용역들은 지배자들 본인이었던가? 아니다.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과 맞서 싸운 구사대는 자본가들 본인이었던가? 아니다. 침략전쟁에 나선 파병군인들은 관료들이었던가? 아니다. 모두가 빈민, 부자유한 자, 그리고 노동자였다. 상처를 주는 역할도, 상처를 받는 역할도 부자유한 자들의 몫이다. 부자유한 우리는 점점 더 악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본질적 모습이 아니다.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습일 뿐이다. 물질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자들에게 지배와 간섭은 일상이다. 

수탈당한 자유와 권리는 구걸로 돌려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흥정으로 돌려받을 수도 없다. 애시당초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수탈당한 우리가 흥정할 자산이 어디에 남아있는가? 수탈당한 모든 것을 돌려받을 방법은 역수탈 뿐이다. 이윤으로 전환된 모든 개인의 삶, 기여 없이 증식하는 자본가치, 이 모든 것은 보편적 개인이 돌려받아야 한다. 모든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은 강제적 환수를 통해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으로 지급되어야 한다. 사회는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삶에 필요한 제반요건을 보장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부자유는 오직 ‘탈취의 부자유’ 뿐이다. 오직 우리가 같은 공화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헌법1조는 이 나라를 ‘민주공화국’이라 규정하고 있다. 민주공화국은 모든 국민이 주권을 가지는 나라이며, 모든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실질적 자유를 가지는 나라이다. 국민주권은 국민 모두의 복지라는 사회경제적인 기본 조건이 충족된 경우에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보편적이고 충분한 복지는 민주공화국의 기초적 토대이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모든 의무와 책임을 가진다. 노동이나 자산, 가족관계나 그 어떤 것도 민주공화국의 복지를 위한 거래대상이 될 수 없다. 민주공화국의 복지는 보편적이며, 조건이 없어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모든 국민은 그들이 실질적인 주권자가 되기 위하여 물질적 독립을 보장받아야 한다. 기본소득은 모두의 억류된 자유와 권리에 대한 요구이며,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요구이다. 억류된 자유를 해방하라.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라.


2010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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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7일


2010년 4월 19일

pheeree 혜정  베레레 희나람

2010년 4월 20일

데일쿠퍼 박대진 용호 juno

2010년 4월 21일

똘랑 Noel

2010년 4월 22일

야우리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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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wealth> 3.1.3 "삶정치적 생산과 통제의 위기" 논의의 틀

지필묵 2010. 4. 20. 19:36


 '노동'의 기술적 구성
자본의 대응 (통제방식) 

다중의 요구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 
공통적인 것을 파괴하기

재전유권 
 노동의 여성화
불안정성(precarity) = 시간의 빈곤

보장소득 
이주와 사회적 혼합 
 인종적·사회적 장벽들 = 공간의 빈곤  

전지구적 시민권 

                       구성                                             탈구성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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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NO! G8 Action 리플렛

지필묵 2010. 4. 12. 00:16

2008년 G8정상회담에 대항하여 NO! G8 Action이 만든 리플렛 전문.



G8회담이란?

2008년 7월 홋까이도 토야호에서 G8정상회담이 열린다.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러시아 8개국 정상과 EU 위원장이 참가하여 개최되는 정상회담이다.
회담은 1975년 2번의 닉슨 쇼크(달러쇼크와 오일쇼크)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미국의 특권적인 지위가 흔들리자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유럽 국가들이 소집된 것이다.
회담은 통화와 무역, 안전보장 등을 선진국끼리 조정하기 위한 사적인 회합이다. 자본주의의 주요국들이 협조하여 세계의 부를 독점하기 위한 궁리를 하는 장이 바로 이 회담이다. 그러한 세계전략의 중심이 되어온 것이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정책이다.
현재 세계적인 빈곤은 회담이 주도하는 세계정책, 즉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만들어졌다.
 
빈곤과 공포를 확산하는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은 1973년. 남미 칠레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실현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장군은 쿠데타를 통해 민주정권을 뒤엎고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다. 이때 칠레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을 담당한 것이 미국의 경제학자, 즉 신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 정책은 네 가지로 구성된다.
1.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
2. 사회보장 삭감과 공적 사업의 민영화
3. 노동조합, 농민단체 등 금지
4. 군비와 경찰 강화
이 정책은 실업과 빈곤을 확대시키고 삼엄한 경찰국가를 가져온다. 칠레의 경제는 일시적인 버블경기 이후, 심각한 불황에 빠져있다. 생활이 곤궁한 민중들의 목소리는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버린다.
칠레에 이어 영국의 대처 정권, 미국의 레이건 정권, 일본의 나까소네 정권이 이 정책을 자국에 적용한다. 80년대에는 IMF(국제통화기금)가 아프리카 국가들에 구조조정정책(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제한다. 이에 따라 농촌은 황폐해지고 공공써비스는 마비되고 사회보장은 사라지고 국민경제는 붕괴되어간다.
90년대에 들어서면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커다란 국제운동이 시작된다.
94년 멕시코 남단에서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봉기한다. 싸빠띠스따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의 위협을 고발하고 세계적 규모의 반대운동을 호소한다. 95년 MAI(세계투자협정)에 반대해 한국과 프랑스에서 큰 운동이 일어난다. 이 반대운동에 의해 MAI는 폐기된다. 97년 통화위기에 빠진 한국에 IMF가 개입한다. IMF의 내정간섭에 대항하여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격심한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99년 미국의 씨애틀에서 WTO(세계무역기구)의 각료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는 거리에 흘러넘친 항의행동에 의해 중지되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회담

G8회담은 ‘모든 사안을 톱-다운(top-down; 상명하달)으로 결정한다’(외무성HP)는 것을 공공연하게 단언하고 있다. 그들은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적절한 결단과 조치를 신속하게 행하는 것’(외무성HP)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비민주적인 회합은 ‘적절한 결단과 조치’를 취해왔던 것일까. 사태는 정반대이다. 이 밀실회합은 전세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세계 대다수의 생활이 파괴되어왔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관료와 거대은행, 경찰이나 자위대가 세력을 떨치고 대다수가 빠듯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다. 지역경제는 피폐해지고 젊은이는 실업을 겪고 고령자는 방치되는 이러한 절망적인 사회를 만든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이며 이 회담이다. 그리고 이런 심각한 정책이 태연하게 실행되어온 것은 회담이 민주주의의 부정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G8회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생활을 소수의 특권계급이 제멋대로 결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 자신의 생활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와 사정을 제대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결정하기 원한다. 부자와 경찰만이 살찌는 사회는 민주적인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며 함께 목소리를 높이자.
 

NO! G8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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