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필묵 2012/03/15 23:09
점령자, 해적, 그리고 기본소득 :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를 위한 우리의 무기
은혜 (연구공간 L)
직업운동가가 사라진 시대의 운동
촛불봉기가 한풀 꺾이면서 ‘촛불사람들’과 함께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모색하다가 기본소득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반가움과 의구심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질문들. 그 반응은 기본소득을 ‘전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뭔가를 좋은 것으로 인식시키려 노력하다보면, 그것이 어느 틈엔가 만능열쇠로 둔갑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되기만 하면’ 식의 사고방식을 심어주게 될까 두려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은 이 짓을 그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짓을 더 잘 하기 위해서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순간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 짓’은 또 다른 세계,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을 말한다. 때로는 촛불시위로, 때로는 점령으로, 때로는 해적질로 드러나는 우리의 투쟁 말이다.
촛불사람들이 저녁마다 생업을 끝내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던 것처럼 그리고 타흐리라이트들과 지구 각 지역의 점령자들이 생업을 미루거나 멈추고 광장을 점령한 것처럼, 오늘날 이른바 99%의 운동은 소수의 직업운동가(조직가)들이 다수의 대중을 동원하는 과거의 운동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 운동 속의 대중은 자신의 생업을 스스로 유연화(태업 혹은 파업)하면서 투쟁에 참여하고, 그 결과 자신의 삶 전체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이는 청년들의 운동으로 좁혀서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그러한 발본적인 차이가 두드러지면 두드러졌지 결코 덜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생업과 운동의 부조화, 즉 생업을 조절하면서 운동에 투신하는 형국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는 좌절과 고통이다. 너무 많은 각오와 너무 많은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 기본소득은 운동을 (기꺼운 방식으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좋은 해법이 된다.
청년-다중의 요구
그러나 기본소득의 형상을 이에 대한 해답 정도로 협소하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기본소득은 한 달에 한 번씩 손에 쥐게 되는 화폐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최소 생계를 보장하는 복지 프로그램’ 이상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것이 기본소득운동의 관건이다. 일전에 나는 이를 위해 「삶정치적 기본소득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가 주장하는 다중의 세 가지 요구―지구시민권·보장소득·재전유권―와 기본소득의 결합을 시도한 바 있다. 즉 보장소득과 상통하는 기본소득을 지구시민권과 재전유권이라는 다른 두 가지 요구와 결합시키는 것이다. 나는 기본소득이 개체―그것이 사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의 재생산에 머물지 않고 공통적인 것의 재생산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결합이 필수적이라고, 그리고 지구시민권과 재전유권 역시 기본소득(보장소득) 못지않게 다중에게 (특히 청년-다중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먼저 지구시민권을 살펴보자. 지구시민권(the right to global citizenship)은 자본이 세워놓은 갖가지 사회적(물리적, 인종적, 젠더적, 문화적) 장벽과 위계를 무너뜨려 자본에게 빼앗겼던 공간의 자율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구’시민권이라고 해서 단지 자유로운 ‘해외 이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global’한 시민권을 요구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지구적인(지구라는 행성 차원의 planetary) 외연적 시민권뿐만 아니라, 위계의 철폐를 의미하는 내포적 시민권(혹은 시민권의 강도 intensity) 또한 포함하고 있다. 이로써 지구는 하나의 메트로폴리스로 사고되기 시작한다.
청년들은 지구라는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속에서 자율적인 사회적 이동 및 이주를 욕망한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 및 이주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마주침들과 관계들을 낳는다. 그 마주침들과 관계들은 다양하고 특이한 지식, 정보, 이미지, 코드, 정동 등 공통적인 것의 조건이자 산물이다. 이동 및 이주에 대한 강조는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계층 간의 이동(이른바 ‘개천에서 용 날 가능성’)을 활성화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지구시민권은 개인의 뛰어남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계층이라는 틀로 환원될 수 없는 월경과 횡단 그리고 점령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지구시민권이 공간의 자율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면, 재전유권(the right to reappropriation)은 공통적인 것의 자율적인 운영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이제까지 자본이 공통적인 것을 파괴 또는 통제해온 방식 중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바로 각종 사유화이다. 물, 가스, 수도, 전기, 교통 등 공공인프라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지식, 정보, 이미지, 정동 등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 있는 제주 강정마을의 경우는, 주민들과 자연환경이 맺는 관계를 파괴하고 땅과 바다를 사유화하려는 시도이다. 토지와 바다를 수용하는 주체가 해군일 뿐 여타의 사유화와 다를 바가 없다.)
접근권이라고 바꿔 부를 수 있는 이 재전유권 역시 청년들과 매우 밀접한데, 특히 지적소유권의 강화와 교육의 부패는 오늘날 전지구적인 청년들의 화두이다. 오늘날의 생산이 곧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지적소유권의 강화(각종 저작권, 상표권, 특허권과 최근 웹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온라인해적행위금지법 SOPA 등)는 생산의 원료이자 수단을 봉쇄하는 것이며 교육의 부패(등록금, 대학기업화, 금융위기 이후 미주와 유럽 등지에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공교육 예산삭감)는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인 주체성의 생산을 봉쇄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이 생산적 힘이자 그 산물이 된 오늘날, 지식과 교육에 대한 접근은 단순히 ‘써비스’를 제공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수탈된 것을 되찾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재전유이기도 하다.
점령자, 해적, 그리고 기본소득
그럼 이제 청년-다중의 세 가지 요구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는지 살펴보자. 먼저 기본소득과 지구시민권의 접속은 ‘기본소득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있다. 이 접속은 기본소득운동의 궤적 속에 이미 들어있다. 한편으로는 기본소득의 핵심적 덕목인 무조건성―심사와 노동의무가 없이 지급되는―이 시민권의 강도를 보장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본소득운동의 지구적 네트워킹이 시민권의 외연을 조금씩 확장시키고 있다. 즉 기본소득과 지구시민권은 국가간 경계와 사회적 위계라는 두 가지 분할선을 모두 넘어서는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국내외 점령자들의 존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월스트리트로 그리고 다시 전지구의 광장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점령운동은, 외연적으로는 기본소득운동이 흘러다닐 수 있는 전지구적 회로를 마련하고 있으며 내포적으로는 과거의 계급론으로 포착될 수 없는 다양한 주체들의 합류를 돕고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점령운동의 지속가능성 또는 재생산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 이는 점령자들의 생계가 안정되어 운동이 좀더 수월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이제껏 자본의 리듬대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교환가치를 획득하는 데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달리 말해 아직-아닌-점령자들이 점령에 동참하도록) 도울 것이라는 전망을 의미한다. 이처럼 점령운동과 기본소득은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를 상승시킨다.
다음으로 기본소득과 재전유권의 접속은 ‘기본소득으로 무엇을 줄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앞서 소개한 글에서, 수탈당한 것을 되찾는 데 있어 소유권이 아닌 접근권을 주장해야 하며 화폐형태로 지급되는 소득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것에 대한 무조건적 접근권’ 역시 소득으로서 쟁취해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지적소유권의 강화와 교육의 부패에 맞선 싸움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다. 국내외 해적들의, 특히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끝날 수 있는 해적행위를 집단적인 운동으로 조직해낸 해적당의 행보가 의미심장해지는 지점이다.
해적운동과 기본소득 역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해적운동은 그 자체로 소유관계와 가치척도에 균열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기본소득과 일치하며, 기본소득이 해적운동과 결합될 때 비로소 우리는 화폐가 아닌 형태의 기본소득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해적운동 역시 기본소득과 결합함으로써 ‘해적들의 딜레마’를 현실적으로 타개할 수 있다. 현재의 컨텐츠 생산-유통-소비 구조 속에서 해적행위는 본의 아니게 대자본과 소생산자 모두에 균열을 가져온다. (‘굿 다운로더’ 캠페인이 바로 소생산자를 인질로 삼아 굿 다운로드, 즉 ‘제값 내고 소비하기’를 강요하는 자본과 국가의 대표적인 술수이다. 그런데 ‘제값’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건가?) 기본소득은 컨텐츠 생산자들의 자립과 해적행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며, 이로써 해적행위가 이른바 ‘팀킬’이 될 여지는 사라지고 해적들은 오로지 자본 및 국가의 해적으로서만 남게 될 것이다.
‘운동들’에서 ‘운동들의 운동’으로
우리는 근대적 정치경제학 용어집의 맥락에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더 이상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있다는 의미에서의 무산자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인간이 곧 생산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이며, 그런 의미에서 탈근대적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 정보, 아이디어, 정동, 관계 등이 곧 생산수단이 되어 또 다른 지식, 정보, 아이디어, 정동, 관계 등 생산물을 낳는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대한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운영을 완전히 마련하지 못한 지금, 그 자체로 생산수단인 우리 자신은 자본과 국가의 압력 앞에서 휘청대기 일쑤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프레카리아트, 즉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트인 것이다.
나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대한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운영의 실마리를 기본소득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제 기본소득을 씨줄로 삼아 한쪽에는 지구시민권과 점령운동이라는 날줄을, 다른 쪽에는 재전유권과 해적운동이라는 날줄을 감을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기본소득운동은 임금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으로도, 당사자 중심의 신사회운동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그럼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당사자가 되는 새로운 운동이다. 기본소득운동, 점령운동, 해적운동, 학생운동, 젠더운동 등 각각의 분과운동들로 존재하던 것에서 ‘운동들의 운동’으로 변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금융자본주의를 점령하고 공통적인 것을 재전유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imirreducible.tistory.com/trackback/137
지필묵 2012/03/15 23:03
Occupiers, Pirates, and Basic Income :
Our Weapons for Reappropriation of the Common
Graco (Commonspace L)
imirreducible@gmail.com
Activism without full-time activists
Once I brought up Basic Income (BI) to some candlelight protesters, and I faced a barrage of questions from them. I tried to tell them how important BI is for us. But I was afraid that they might think of BI as a sort of master key : 'We have only to introduce BI and then everything will be OK.' So I said : 'Real struggle begins precisely when BI is introduced. That's why we need BI.' This 'real struggle' actually means a variety of struggles for 'another world' and 'much better life', struggles which appear now as candlelight protest, now as occupying, and now as piracy etc.
Candlelight People gathered in Seoul Square every evening after work, and Tahrirites and many occupiers all around the world occupied the squares stopping or holding off their work. From this we can tell that today 99% movements are completely different from old movements where a few full-time activists mobilize the masses. Now the masses coordinate their own work and participation in struggles, and moreover they come to recompose their own lives in another rhythm. But there is a problem, that is, the discord between the action and the work for their living, and the frustration and pain this discord necessarily brings them. They are, as individuals, always required to spend much energy and make a lot of sacrifice in movements. BI can be a good solution to making our struggles endurable and sustainable.
Demands of Youth-Multitude
We, however, must not consider BI only as a 'good solution', because BI is more than money-in-our-hand. In BI movement, both theoretically and practically, what is at stake is whether BI movement can go beyond 'welfare program for minimum living'. In my paper, "Towards Biopolitical Basic Income", I tried to connect BI with three demands of multitude, suggested by Micheal Hardt and Antonio Negri : the right to global citizenship, unconditional guaranteed income, the right to reappropriation. To be more specific, I connected BI, as a version of unconditional guaranteed income, with the right to global citizenship and the right to reappropriation. I think this combination is indispensible if we want to go beyond the reproduction of the individual (be it private or public) towards the production (and reproduction) of the common.
The right to global citizenship is needed to break through social (and physical, cultural, racial, gender) barriers established by capital and reclaim the autonomy of space. But 'global' citizenship does not simply mean a 'free migration'. To demand 'global' citizenship includes not just extensive, i.e. literally 'planetary', citizenship but intensive citizenship (or intensity of citizenship) which means an abolition of hierarchies. Hence the earth as a metropolis.
Young people desire autonomous social mobility in this metropolis and then the mobility leads to many different encounters and relations. These are the precondition and the product of the common which is composed of multiple and singular knowledge, information, images, codes, affect. Social mobility, however, has nothing to do with 'class mobility' in the bourgeois sense. Global citizenship is not what is obtained by personal outstandingness, but what is ontological. What is important is to make possible traversing and occupying which cannot be confined within fixed borders.
The right to reapproriation aims to reclaim autonomous government of the common. It is the privatization that has been the most remarkable measure capital has taken so far. There have been no end of attempts to privatize not only public infrastructure (water, gas, electricity, transportation etc.) but also knowledge, information, images, affect and the like. (In Gangjung, Jeju, specifically, ROK Navy is attempting to destroy the relation of inhabitants with their natural surroundings and to privatize earth and sea.)
The right to reappropriation, aka the right to 'access', is also closely related to young people, and especially the reinforcement of intellectual property and the corruption of education are today global issues for them. If today's production is indeed the production of the common, the reinforcement of intellectual property (such as trademarks, patents, and the recent SOPA) would be to block access to materials and means of production and the corruption of education (such as high tuition, corporatization of university, budget cut in public education) would be to block the production of autonomous subjectivity. Today when the common is productive force and product simultaneously, access to knowledge and education is no mere 'service'. It enables us to reappropriate even the means of production.
The Chemistry of Occupiers, Pirates, and Basic Income
Now, let's talk about how the three demands of youth-multitude connect with each other and what chemistry this connection leads to. <BI + Global Citizenship> is related to a question : to whom BI is given. This is already included in BI movement : on one hand, unconditionalness of BI guarantees the intensity of citizenship, and on the other hand, global networking of BI movement expands the scope of BI to a global scale. Thus <BI + Global Citizenship> involves breaking through both inter-state borders and social hierarchies. Here Occupy movement going on all around the world becomes more significant.
Extensively, from Tahrir Square to Wall Street and to squares elsewhere in the world, Occupy movement is building global circuits for BI movement, and, intensively, it is helping a variety of subjects (never to be captured into old notion of class) to converge. And BI guarantees sustainability or reproducibility of Occupy movement. Thus occupiers can continue to join and cooperate together in a stable condition. And more significantly, people who have lived to the rhythm of capital come to make a self-determination about their own life regardless of the acquisition of exchange value. (In other words, not-yet-occupiers come to join Occupy movement.) In this way, Occupy movement and BI create a synergy effect.
<BI + Reappropriation> is related to another question : in what form BI is acquired. I have asserted that we should insist on not property but access and the income should be acquired not only in the form of money but also in the form of 'unconditional access to the common'. In this sense, I have suggested struggles against the reinforcement of intellectual property and the corruption of education as our most important task. Pirates all around the world and especially Pirate Party that has organized individual piracies into a collective movement, here, become significant.
Piracy movement and BI create a synergy effect, too. Piracy movement coincides with BI in the sense that they rupture property relation and the measure of value. When Piracy movement and BI are connected, we can imagine another form of BI than that of money. Piracy movement can overcome 'the dilemma of pirates' in practice by combining with BI. Given the present structure of production-distribution-consumption of contents, it can happen that we come to attack, unwillingly, small producers, along with large capitals. BI must be a kind of bridge between independence of producers from capital and piracy against capital.
From Movements to Movement of Movements
We are no longer 'proletariat' in the lexicon of modern political economy, which means people separated from means of production. In our age, human beings become the very means of production, and that is why this age is called 'post'modern. Knowledge, information, ideas, affect, relations and so on become means of production and they go to producing more knowledge, information, ideas, affect, relation etc. Now when we have not yet attained completely autonomous and democratic government of the common, we often falter under the dead weight of capital and state. In this sense, we are precariat, that is, precarious proletariat.
I have found, in BI, a clue to autonomous and democratic government of the common. And now, I suggest that we should connect BI with Occupy movement (Global Citizenship) and Piracy movement (Reappropriation). BI movement recomposed in this way cannot be reduced either to working class movement or to new social movements. This is a brand-new movement whose protagonists are all the people constituting the world and taking part in the production of the common.
Creating 'a movement of movements' out of separate movements (BI, Occupy, Piracy, LGBTQ, Student Movement and so forth)―this is one of the most powerful weapons of ours to occupy financial capitalism and to reappropriate the common.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imirreducible.tistory.com/trackback/138
지필묵 2011/11/06 19:21
코뮤니즘이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특이화 치료라고 불러야 한다.
비포 bifo | 은혜 옮김
1.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 감당할 수 없다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은 걱정한다. 그들은 그것을 위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난 세기에 ‘경제’를 습격하고서 더 강한 ‘자본주의’를 남겨두고 사라진 이전의 엄청난 위기처럼, 그것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나는 이번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생산력(전지구적 네트워크에서의 인지노동)의 힘(potency)과 성장패러다임이 양립불가능하다는 징후이다.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500년간 지속된 씨스템의 마지막 붕괴이다. 다음과 같은 풍경을 보라. 세계의 거대권력들은 금융기관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금융의 붕괴는 산업씨스템에 영향을 주었다. 수요는 떨어지고 있고,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 국가는 은행들을 구제하기 위해 미래의 납세자들에게서 돈을 걷고 있는데, 이는 수요가 갈수록 더 떨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가계소비는 급감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많은 산업생산이 퇴출될 것이다. 이것은 그저 한 두 해 지속될 일이 아니다. 이번 경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에 실린 기사에서 중도보수인 데이빗 브룩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우리의 경제적 지식이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것, 즉 전지구적 경제의 복잡성이 어떠한 지식과 협치도 훨씬 넘어서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2009년 2월 10일 미국 재무부장관 티모씨 가이트너는 오바마의 구제계획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 포괄적인 전략은 돈이 들고 위험을 수반하며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그것을 변화된 조건에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제껏 시도해 본 적 없는 일들을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악화되는 시기, 그리고 그 과정이 순탄치 않거나 저지당하는 시기를 거칠 것입니다.” 이 말이 가이트너의 지적인 정직함을, 그리고 부시 일파와 비교되는 미국의 새로운 지도층이라는 인상적인 변별점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정치적 자신감의 붕괴를 지적한다. 우리가 ‘근대 합리주의’ 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적 지식은 이제 소용이 없다. 카오스(즉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복잡성의 정도)는 세계의 새로운 왕이다. 오늘날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경제적’ 합리화나 적응이라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은 더 이상 인간활동의 보편적 규칙일 수 없다. 이것을 직시하자.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는 끝났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2. 네트 vs. 범죄
‘신자유주의적’ 경제, 즉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법칙에 기반을 둔 경제의 발흥과 쇠퇴를 되돌아보자. 지난 30년의 탈근대 경제에는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네트경제(Net-Economy)’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적 자본주의(Criminal capitalism)’라는 얼굴이다. 네트경제는 협력과 공유에, 사회적 활동을 관리하는 새로운 방식의 창조에 기초한다. 네트경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한 소유라는 원리에 도전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소유라는 원칙을 재평가하고 재부과하기 위해 범죄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자본주의의 범죄적 얼굴은 이윤추구와 경쟁의 신성화를 위해 모든 법치를 폐기하는 것에 기초한다. 범죄적 정치는 전지구적 경제를 현재와 같은 엉망진창인 상태로 만들었는데, 범죄자들은 규제완화에 의해 초래된 카오스적 실재를 통치하는 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국에서 정권을 잡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실패했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기만의 그림자 속에서 번성한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틀어쥐고서 마지막 대결을 준비한다.
일반지성과 범죄적 지배계급 사이에서 모순이 자라고 있다. 누가 이길 것인가?
미국에서의 오바마의 승리는 인류진화의 새 시대를 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일반지성이라는 평화적인 무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던져주었다. 새 대통령은 인지노동에 의해 득표했으며, 이 승리는 체니-부시로 표상되는 범죄계급의 패배이다. 그러나 이 승리는 싸움의 시작일 뿐이며, 그것은 무지·폭력·이윤이라는 잔혹한 힘(force)에 맞서는 지성적 힘의 싸움이 될 것이다.
모험적인 금융투기꾼들, 대기업 경영자들, 마피아 같은 룸펜부르지아지로 구성된 범죄계급은 두 가지 움직임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첫째, 모든 윤리적, 정치적, 혹은 법적 규칙에서 경쟁이 으뜸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선언을 통해. 둘째, 집단적 사고를 생산하는 씨스템, 즉 미디어 씨스템의 점유를 통해. 미디어 씨스템은 사회적 기대과 집단적 상상력을 가공하면서 생산적인 인지적 계급과 대비되었고 결국 그 계급을 압도했다. 그리고 착취자들의 사악한 꿈에 피착취자들을 예속시켰다.
소통의 사회적 공간(광고, TV)에 대한 사적 점유는 소외된 동일시와 삶·욕구·소비의 사유화라는 효과를 낳았다. 욕구는 자연스러운 충동이 아니라, 기업 미디어-씨스템에 의해 독점된 사회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본뜨는 문화적 행동의 산물이다. 삶의 사유화는 사회적 연대를 분쇄했고, 각 사람에게 자신의 필요에 대해 고립 속에서 사고하도록 강요했다. 공공영역에 대한 왜곡인 이동성의 사유화를 예로 들어보자. 비합리적이고 공해를 일으키는 성가신 물건인 자가용(무게가 고작 80킬로그램인 신체를 이동시키는 데 드는 3톤의 철)은 20세기 내내 산업생산의 중심제품이었다.
왜 자동차는 사적이어야 하는가? 자동차는 모든 사람이 필요한 시간동안 타고 사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잠그지 않은 채로 두어서 모든 사람의 교통수단이 될 준비가 되어있는 공적인 제품이 될 수 있다. 자동차는 훨씬 더 편안한 공공 교통씨스템으로 대체될 수 있다. 지난 몇 십년간 공공 교통씨스템은 왜 지배계급에 의해 방해받아 왔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적 경제는 모든 다른 영역에서처럼 교통운송영역에서도 부족(不足)을 창출한다. 부족의 창출은 축적의 전제이며, 그것은 욕구의 사유화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90년대 내내 네트워크된 생산의 부상과 자유주의적 싸이버문화는 금융자본주의와 인지노동 간의 동맹의 길을 열었다. 닷컴(dotcom)이라는 기치 아래, 젊은 지식인들과 과학자들이 자기 회사를 차릴 돈을 발견할 수 있었고, 수익 재분배 과정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범죄계급이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힘(potency)을 장악하여 그것을 전쟁의 힘(power)에 종속시켰을 때 이 동맹은 깨졌다. 닷컴의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미끼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세기가 바뀐 후 처음 십년간, 지적 노동은 불안정해졌고 어떤 경제적 협박이라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범죄계급은 인지노동을 노예로 만들었다. 지식은 단편화되었고, 수익은 감소했으며, 착취와 스트레스는 계속 늘어났다.
닷컴의 몰락과 9.11은 테크놀로지와 지식의 힘을 악용하고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으면서, 그리고 전세계에 증오를 폭발시키면서, 하이테크놀로지 경험의 종속을 나타냈다. ‘공포’의 대량생산, 광신, 무지는 서구인들이 전쟁에 동의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부시대통령은 서방시민들로 하여금 떠나서 쇼핑을 하게 만들었다. 테러 대 쇼핑, 침울한 심리상태 대 쇼핑.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소비는 방대한 ‘빚’을 통해 이루어졌다.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은 쓸모없는 것들을 많이 사도록 체계적으로 강요당했고, 정신적으로는 광고에 홀렸다. 그리고 행복을 소비와, 웰빙을 재산의 양과 동일시하도록 강요당했다.
획득으로 환원된 웰빙과 욕구의 사유화가 이 존엄과 자기애에 대한 어떠한 감각도 파괴했다. 사회적 주목시간은 정보노동과 광고의 흐름에 의해 점령당했다. 노동이 언어를 흡수했고 언어에는 정동이 실리지 않게 되었다. 사랑, 다정함, 쎅스, 애정, 타인에 대한 돌봄은 상품으로 바뀌었다. 모든 사람은 수많은 신용카드와 쇼핑기계의 주인이 되었고,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 더욱 더 일해야만 했다. 빚은 보편적인 사슬이 되었고 보편적인 붕괴의 완벽한 조건을 창출했다. 마침내 붕괴가 일어났다.
성장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난 30년간 축적된 ‘빚’을 사람들이 결코 갚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물리적 자원들이 거의 소진되었고 사회적 두뇌의 신경을 이루는 자원들이 거의 파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3. 윤리적 저항과 전쟁
지구화와 사유화 과정이 비판을 압도하면서 진행되었고 그 파괴적인 잠재력이 ‘신자유주의적’ 스승들의 말씀에 잘 숨겨져 있던 90년대 말에, 윤리적 저항운동이 인지노동자의 대열로부터, 그리고 규제완화의 위험을 의식하게 된 노동자들의 대열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자본주의적 세기말에, 서방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는 씨애틀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 WTO회담을 저지하고 전지구적 착취효과에 항의하기 위해 행진했다.
그것은 ‘윤리적 시위의 시대’의 서막이었다. 씨애틀에서 제노바, 프라하에서 볼로냐, 그리고 칸쿤까지, 불안정노동자이자 인지노동자인 군중들은 함께 행진했다. 그들은 세계의 ‘윤리의식’이었는데, 물론 그들은 범죄계급의 교사 아래 경찰의 공격에 맞닥뜨렸다. 어떤 이는 죽임을 당했고, 많은 이들이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지구인들에게 거대한 위기가 다가왔음을 경고하려 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옳았다는 것을 안다. 반지구화(No-global) 시위자들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파국에 대해 경고했다. 그리고 이제 파국이 도래했다.
파국은 그리스어로 관찰자들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위치의 변화를 의미한다. 파국은 가시성의 새로운 공간들을, 따라서 가능성의 새로운 공간들을 열어젖힌다. 그러나 그것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윤리적 시위자들은 2003년 2월 15일 전쟁에 대항하는 전세계적 행진 이후 패배했다. 그날 수억 명이 이라크전쟁에 대항하여 행진했다. 부시대통령은 사람들의 충고가 필요하지 않다고 답하고는 전쟁을 시작했다.
무지의 범죄계급이 ‘일반지성’의 운동에 맞서 이겼다. 그것이 지금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이유이다.
그 후 폭력이 폭력에 맞섰고 광신이 광신과 싸웠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 파키스탄에서 이란, 그리고 조지아까지 미국 권력은 모든 곳에서 패배했고 고립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금융 붕괴는 지정학적 패배와 무관하지 않다. 윤리적 시위 기간이 끝나가는 동안 봉기의 새로운 순환이 서구 어딘가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경기후퇴가 사회적 삶을 파괴하는 동안, 2005년 11월 빠리 방리우에서의 폭동, 2006년 와하까에서의 교사들의 봉기, 2008년 12월 그리스 전역에서 일어났던 반란의 폭발은 앞으로 세계의 여러 부분을 습격할 반란적 물결의 조짐이었다.
산발적인 반란들이 앞으로 일어나겠지만, 우리는 그것에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 반란들은 대도시 공간의 군사화로 인해 권력의 진정한 중심에 닿을 수 없을 것이고, 물질적 부나 정치권력에 있어 많은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도덕적인 반지구화 시위의 기나긴 물결이 ‘신자유주의적’ 권력을 파괴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 반란들 역시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감성을 드러내고 확산시키지 않고서는 해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해법은 일상생활을 바꾸는, 그리고 전지구적 네트워크라는 의식과 문화에 뿌리를 둔 일시적이지 않은 자율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완전고용은 끝났다. 세계는 그렇게 많은 노동과 착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노동시간의 근본적인 감소가 필요하다. 삶의 권리로서 고용으로부터 독립되고 노동시간의 양도와 무관한 기본소득이 확정되어야 한다. 능력, 지식, 숙련은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맥락에서 분리되어야 하며, 자유로운 사회적 활동으로 새롭게 사고되어야 한다.
4. 도덕적 채무 갚기
최근의 경기후퇴를 경제적 관점으로 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세계자원과 세계권력의 분배를 바꿀 인류학적 전환점으로 봐야한다. 유럽은 식민주의 500년의 종말과 동시에 그 경제적 특권을 잃어버릴 운명에 있다. 서구인들이 축적한 ‘빚’은 경제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다. 이제 억압, 폭력, 인종청소라는 빚이 청산되어야 하는데 그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유럽인’의 대부분은 경기후퇴가 부과할 부의 재분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주의 물결에 습격당한 유럽은 점증하는 인종주의적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윤리적 전쟁은 피하기 힘들어 질 것이다. 미국에서의 버락 오바마의 승리는 근대 자본주의 씨스템의 전제였던 서구지배의 종식의 서막을 알렸다. 정체성주의적이지 않은 토착적 ‘르네쌍스’의 물결이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일고 있다.
노동과 자본 간의 투쟁은 예상치 못한 성과를 얻을지 모를 새로운 국면에 도달했다. 새로운 미 행정부가 정말로 무엇을 할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앞서 언급한 가이트너의 말은 오바마 행정부가 시행착오를 통해 방법을 찾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포스트파르티잔 실용주의(post-partisan pragmatism)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20세기에 통했던 낡은 이데올로기적 해법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오늘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현실에 맞지 않다. 지배계급과 경제학자들은 경기후퇴에 맞서기 위해 낡은 방법들을 제안하고 있다. 새로운 땅에 낡은 지도를 사용하는 격이다. 모두가 “보호주의는 피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각 나라들은 국가경제를 보호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늘 그렇듯이 국가가 은행을 구제해야한다고, 부채를 갚고 신용을 복구해야한다고, 그 다음에 기업주들이 기업을 경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국가가 은행을 인수하고 공장을 국유화해야한다고 말한다. 국유화된 공장들이 똑같은 물건을 계속 생산한다면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공적 소유냐 사적 소유냐의 양자택일은 거짓된 것이다. 해법은 더 이상 ‘경제’의 왕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의 왕국에 있다. ‘성장’모델이 깊이 내면화되어왔다. 그것은 매일의 삶에, 지각(知覺)에, 욕구에, 그리고 소비스타일에 침투한다. 문화적 행동은 이 모델로부터 사회를 해방시켜야 한다.
5. 지양 없는 코뮤니즘
기본적 욕구(주거, 교통, 식량)와 사회적 써비스의 사유화는 부와 웰빙을 소유한 재산의 양과 문화적으로 동일시하는 데 기초한다. 근대 자본주의의 인류학에서 웰빙은 즐거움이 아니라 획득과 등치되어왔다. 재산과 웰빙의 동일시는 우리가 앞으로 겪을 사회적 불안의 과정 속에서 문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임무이기 전에 문화적 임무이며 정신적 치료 상의(psychotherapeutic) 임무이기도 하다.
사유재산 제도의 이론적 정당화(가령 존 로크의 저작)는, 공유될 수 없는 것이 주는 배타적 즐거움을 확실히 할 필요성에 기초한다. 사과는 나눌 수 없다. 만약 내가 사과를 먹으면 당신은 사과를 먹을 수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서 재화의 상태는 변했다. 그것은 비물질적 재화, 즉 사용해도 소모되지 않는 기호적 물건이다. 재화가 기호적 생산물이 될 때 사유재산은 부적절해지며, 사유재산을 강제하기가 실상 더욱더 어려워진다. 불법복제에 반대하는 캠페인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진짜 해적은, 필사적으로 집단지성의 산물을 사유화하려고 하는, 그리고 생산자들의 커뮤니티에 억지로 세금을 부과하려고 하는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집단지성의 산물은 내재적으로 공통적이다. 지식은 단편화될 수도, 사적으로 소유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금융시장의 붕괴가 하이퍼자본주의의 기초가 갖는 취약성을 드러낼 때, 코뮤니즘의 새로운 유형은 이미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테크놀로지적 변형으로부터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성장’과 ‘부채’가 그리고 웰빙으로서의 사적 소비가 최근에 붕괴한 것에서, 변형의 새로운 물결을 예측할 수 있다. 지식의 공통성, 사적 소유의 이데올로기적 위기, ‘욕구’의 절실하게 필요한 공통화―이 세 가지 힘 때문에 새로운 지평이 보이게 되고 새로운 풍경이 드러날 것이다. 코뮤니즘이 돌아오는 것이다.
전위의 주의주의와 의지에, 그리고 ‘새로운 전체성(New Totality)’에 대한 편집증적 기대에 기초한 ‘코뮤니즘’의 낡은 얼굴은 20세기 말에 패배했으며 결코 부활할 수 없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코뮤니즘이 필연성의 형태로, 자본주의 씨스템의 급격한 붕괴의 불가피한 성과로 드러날 것이다. 자본의 코뮤니즘은 야만적인 필연성이다. 우리는 이 필연성에 자유를 집어넣어야 한다. 우리는 이 필연성을 조직된 의식적 선택으로 만들어야 한다.
코뮤니즘이 돌아왔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불러야 한다. 역사적 기억이 ‘종교’의 정치적 전횡과 이 특정형태의 사회적 조직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역사적 코뮤니즘은 ‘전체성’이 ‘특이성’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에 기초했다. 그러나 20세기의 ‘코뮤니즘’ 운동을 정의한 변증법적인 틀은 완전히 버려졌고, 결코 아무도 그것을 부활시킬 수 없을 것이다.
‘역사주의’라고 이름 붙여진 종류의 종교적 신념의 형성에서 헤겔의 패권은 주요한 역할을 했다. ‘지양’(이념의 실현을 위한 실재적인 것의 폐기)은 코뮤니즘의 총체적 개념화의 편집증적 배경이다. 그러한 변증법적 틀 안에서 ‘코뮤니즘’은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성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적 전체성을 폐기하고 난 후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었다. 주체(노동계급의 의지와 행동)는 낡은 것의 폐기와 ‘새로운 것’의 복구를 위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6. 특이성들
산업노동계급은 개념들의 생산의 외부에 있기에 오직 ‘전체화와 폐기’라는 신화와 동일시될 수 있지만, 일반지성은 그
렇게 할 수 없다. 일반지성은 이기 팝(Iggy Pop)의 물고기와 같다. “물고기에게는 목소리가 없고, 표현이 없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일반지성은 20세기에 있었던 레닌주의적 당과 같은 표현적 주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반지성’의 정치적 표현은 기호를 알고 창조하고 생산하는 행동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특이성들의 다층적이고 공통적인 진화와 특이화의 ‘동학’이라는 복수(複數)의 장을 위해 ‘변증법’의 장을 버렸다. 자본주의는 끝났지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시적이지 않은 자율지대’의 창조는 어떠한 전체화도 생겨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카타르시스적 사건을 목격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국가권력’의 갑작스런 붕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수개월, 수년 동안 우리는 일종의 ‘주체 없는 혁명’을 목격할 것이다. 이 혁명을 주체화하기 위해 우리는 특이성들을 증식시켜야한다. 내 소박한 생각에는 이것이 우리의 문화적, 정치적 임무이다.
‘폐기와 전체화라는 변증법’의 장을 떠난 후, 이제 우리는 재조합과 특이화―펠릭스 가따리의 저작, 특히 그의 후기 저작인 『카오스모제』에서 분명하게 다루어진 개념―의 동학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려 한다. 특이성은 ‘개체’(individual)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집단적인 특이성들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이성이라는 단어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순응과 반복의 어떠한 규칙도 따르지 않는, 그리고 어떠한 역사적 필연성에도 갇히지 않는 동인(動因)이다. 특이성은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다. 논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역사의 결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7. 끝없는 과정
우리는 사회적 풍경의 빠른 변화보다는 새로운 경향들의 느린 출현을 기대해야 한다. 무너져가는 지배적 경제의 장을 떠나는 커뮤니티들, 구직을 포기하고 자신들만의 써비스 네트워크를 창조하는 더 많은 개인들이 바로 그 경향을 이룬다.
산업의 해체는 사회적 삶이 더 이상 산업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멈출 수 없다. ‘성장’이라는 신화는 버림받을 것이며, 사람들은 부를 분배하는 새로운 양식을 모색할 것이다. 특이한 커뮤니티들은 바로 부와 웰빙에 대한 인식(perception)을 간소함과 자유라는 의미에서 변형시킬 것이다. 이러한 이행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적 혁명은 부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 우리는 이 혁명의 과정에서, 획득에 필요한 돈을 구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에 누릴 수 없는 그런 점증하는 재화를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부로 인식하는 데서 벗어나, 양이 얼마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누리는 것이다.
재화와 써비스의 탈사유화는 이러한 절실한 문화적 혁명을 통해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계획되고 단일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특이한 개인들과 커뮤니티들의 [사유화로부터의] 이탈이 갖는 효과일 것이며, 문화·기쁨·정동을 위한 시간의 해방과 공통적인 재화·써비스를 함께 이용하는 경제의 창조가 갖는 결과일 것이다. 이 과정이 사회의 주변부까지 확대되는 동안, 범죄계급은 자신의 권력을 계속 붙들고 있을 것이며 더욱더 억압적인 법제화를 집행할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점점 더 공격적이고 절박하게 될 것이다. 윤리적 내전은 바로 시민의 삶의 짜임새(fabric)를 파괴하면서 전 유럽으로 확대될 것이다.
특이성들의 증식(이탈과 일시적이지 않은 자율지대의 구축)은 평화적인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순응적인 다수는 폭력적으로 대응할 것이며, 이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순응적인 다수는 지적인 에너지가 달아나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지적인 활동의 표현을 공격하고 있다. 이 상황은 ‘미디어-전체주의’에 의해 생산된 ‘대중 무지’와 공유된 ‘일반지성’ 사이의 싸움으로 묘사될 수 있다.
우리는 이 과정의 성과가 무엇일지 예측할 수 없다. 우리의 임무는 자율의 장을 확장시키고 지키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공격적인 ‘대중 무지’의 장과 어떠한 폭력적 접촉도 피하는 것이다. 대립적이지 않은 이러한 이탈 전략이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인종주의와 파시즘에 의해 대립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원치 않는 갈등일 경우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예견할 수 없다. 비폭력적 대응은 분명 최선의 선택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적 소유와 웰빙의 동일시는 뿌리가 매우 깊어서 인간 환경의 야만화(barbarization)가 완전히 배제될 수도 없다. 그러나 일반지성의 임무는 정확히 다음과 같다. 편집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인류의 저항의 공간을 창조하기, 하이테크-로우에너지(high-tech-low-energy) 생산에 기초한 생산의 자율적 형태를 실험하기. 다른 한편으로는 범죄계급 및 순응적인 사람들과의 대립을 피하기.
정치와 치료는 앞으로 하나의 동일한 활동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절망과 우울과 공황상태를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성장이데올로기가 폐기된 이후의 경제(post-growth economy)를 감당할 수 없고, 용해되고 있는 근대적 정체성을 그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적 임무는 그들에게 주목하며 그들의 광기를 돌보고 그들에게 행복한 적응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치료를 위한 전염공간의 역할을 할, 인류의 저항의 사회적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자율적이게 되는 과정은 ‘지양’이 아니라 ‘치료’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전체화하지도 않고 과거를 파괴하거나 폐기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끝없는 과정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2009년 2월, 런던
* [역주] 에밀 쿠스투리차의 영화 <아리조나 드림> OST 삽입곡 This is a film의 가사.
This is a film about a man and a fish.
This is a film about dramatic relationship between a man and a fish.
The man stands between life and death.
The man thinks,
The horse thinks,
The sheep thinks,
The cow thinks,
The dog thinks.
The fish doesn't think.
The fish is mute.
Expressionless.
The fish doesn't think,
Because the fish knows
Everything.
The fish knows
Everything.
『자율평론』 29호, 『아우또노마 M』3호 (2009년 가을)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imirreducible.tistory.com/trackback/133
지필묵 2011/06/03 02:46
심광현의 「기본소득,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선순환의 고리」에 대한 토론문
은혜 (연구공간 L)
“나는 자본주의다. 나의 사회에서는 비경제적으로 생산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게으르다는 딱지를 붙인다.”
@_Capitalism_
심광현의 「기본소득,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선순환의 고리」는 “한국사회는 IMF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발전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완성되는 가운데 자동화 기술의 기하급수적 가속화가 노동을 잠식하여 비정규직위 규모가 정규직을 능가하고,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을 심화하는 방향으로 달려 왔”으며, “이런 격랑에 대해 수세적 대응에 머물러 왔던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도 당장 “근본적인 이행”을 고민하지 않고서는 어떤 해법도 찾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는 현실 진단으로 시작한다.(3쪽)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진단 하에, “기본소득운동이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공세적인 운동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요건을 제시한다. 하나는 “그 결과가 국민경제 전체를 위축시키지 않고 지속 가능하게 하는 데에 긍정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늘어난 자유시간이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이나 소비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자율적이고 연대적인 형태의 문화적 향유와 교통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쪽)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기본소득운동의 이 두 가지 요건은 일견 사뭇 다른 성격의 논의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관점 또는 원리는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노동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한 축에는 국민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다른 한 축에는 자유시간의 자율적․연대적 재구성을 놓는 것은 노동시간/자유시간, 노동/비노동, 생산/소비라는 구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드러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저자는 이 분할을 노동과 문화라는 용어로 대체하며 양자의 선순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할의 틀은 “<노동의 양과 무관한 소득에 대한 권리>와 <노동에 대한 권리> 사이의 <단절 없는 결합>”(9-10쪽)이라는 기본소득의 좌파적 재구성에서 반복되고 있다.
양자의 선순환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이러한 구분은 전통적인 근대적 이분법에 비해 상호배타성의 정도가 덜하다. 그러나 노동/문화에 대한 기존의 이항대립적 관념을 유지한 채 이루어지는 결합은 크고 오래된 ‘단절’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과연 노동와 문화를 동등한 항으로서, 즉 동일한 층위에 있는 별도의 영역으로서 다루는 것이 타당한가이다. 기계적인 분할을 전제한 채 하나를 다른 하나에 덧대는 방식으로 오늘날의 노동과 문화의 관계를, 그리고 선순환이라는 기획을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가 말이다.
저자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기본소득운동을 매개로 한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의 새로운 연대”)는 각 운동부문들의 연대를 구축하고 강화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형태 forms of life를 뿌리내리기 위한 실험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특히 주체들이 삶의 운영에 관한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네트워크와 제도적 장치들을 창안하는 것은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디어들은 노동과정 대 노동과정 외부라는 분할 속에 머물러 있다. 노동 내의 위계를 허물고 창조적 숙련노동에 대한 접근을 확대하는 것(노동과정의 재구성)과 자본주의적 소비를 자율적이고 연대적인 향유로 전환하는 것(노동과정 외부의 재구성)이 중요한 과제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보다 발본적인 선순환을 위해서는 그러한 분할의 틀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동안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러나 부의 생산에 기여해온 영역을 재조명해야하는 것이다.
저자의 용어로 바꿔 말하면, 이는 (창작․향유를 막론한) ‘문화’활동이 곧 노동임을 규명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인지적이고 정동적인 측면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는 오늘날의 생산의 조건에서, 노동과 문화의 결합은 별도의 독립된 영역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 결합은 오히려 생산과 재생산이 구별되지 않는 탈근대적 생산활동(마이클 하트와 안또니오 네그리의 용어를 빌자면 ‘삶정치적 생산 biopolitical production’)이라는 맥락 속에 배치되어야 한다.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의 최근 논의(특히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에서 핵심개념으로 제출되고 있는 ‘공통적인 것 the common’과 관련지어본다면, 문화는 공통적인 것―생산의 원료 및 수단인 동시에 산물―이며, 오늘날의 노동은 ‘공통적인 것을 기반으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활동’ 자체로 재정의될 수 있다.
이는 ‘노동권’에 관한 논의와도 밀접하다. 저자의 주장의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는 앙드레 고르의 좌파적 보장소득론은 “<노동의 양과 무관한 소득에 대한 권리>와 <노동에 대한 권리> 사이의 <단절 없는 결합>”을 골자로 한다. 이때 노동에 대한 권리는 단순히 “노동할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규직 노동자와 이로부터 배제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거부”(9쪽)하는 것(가령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노동이라 불리지 못하는 (즉 교환가치화가 불가능한) 수많은 활동들이 부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비임금노동으로 분류되는 활동들에 대한 보수로서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것이 ‘억지’나 ‘몽상’이 아님을 주장해야한다. “소득이 노동 그 자체로부터 독립해서는 안 되고 [단지] 노동시간으로부터 독립되어야한다”(10쪽)는 고르의 주장이 (그의 진의가 무엇이었는가와 관계없이) 오늘날 정치적 함의를 가지려면, ‘소득과 노동의 연동’이나 ‘노동에 대한 권리’에서의 노동은 고전적인 노동/비노동(소비․향유․재생산 등)의 분할을 넘어서야 한다.
노동권 문제는 이른바 ‘노동자성’ 문제로 연결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출현 이후 계속, 그리고 ‘프레카리아트 precariat’나 ‘코그니타리아트 cognitariat’ 등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외연이 엄청나게 확장된 지금 더욱, 논쟁이 되고 있다. 어디까지 노동으로 볼 것인가. 아니, ‘어디까지’라는 한계 설정이 대체 가능하기는 한 건가. 얼마 전 영등포 집창촌 폐쇄로 시작된 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요구와 함께 ‘성노동자도 노동자다’라는 선언을 내걸고 있다. 이것은 성노동만이 처한 특수한 상황이 결코 아니다. 학생들의 수업노동, 예술가들의 예술노동, 주부들의 가사노동 등 인간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데 결정적인 생산활동들이 비노동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 생산자들은 그로부터 생산되는 부를 박탈당하고 있다. “기본소득운동이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공세적인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박탈당한 부를 재전유하기 위한 운동으로 기획되어야 하며, 그러한 작업은 ‘노동자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 없이는 불가능하다.
‘노동’ 또는 ‘노동자성’을 탈근대적 생산조건 속에서 새롭게 정의하고 나면, ‘노동중독증’(18-19쪽)이라는 관점은 무력해진다.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홀거 하이데의 노동중독증 개념은 불안․두려움․우울 등 정동의 차원을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욕망의 생산 주체를 자본으로 설정하고 욕망을 채우려는 움직임을 구조적으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을 채우려 하는 어리석은 움직임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오늘날의 ‘노동중독’은 ‘현혹’의 결과(사치 혹은 낭비)가 아니라, 지극히 실존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극도의 불안정성 속에서 수업노동자는 훗날 안정적으로 고용되기 위해 수업노동/구직노동을 하고, 고용된 임금노동자는 정리해고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임금노동을 하고, 가사노동자는 그 임금노동을 재생산하기 위해 가사노동을 하며, 예술노동자나 성노동자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감동’을 줌으로써 수입을 얻는다.
그 근원이 무엇이건 간에 노동을 ‘중독’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일면적이고 안일한 해석이다. 이는 불안정성에 짓눌린 소외된 노동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태를 읽음으로써 그 속에서 일어나는 활력과 주체성의 생산을 간과하고 있으며, 따라서 활력 및 주체성의 생산이 갖는 집단적․사회적․네트워크적 성격 역시 탈각하고 있다. 생계를 위해 강제당하는 노동임에도 그 속에서 느끼는 성취감, 만족, 기쁨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그려내는 탈주선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노동과 욕망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오늘날 노동을 인지적이고 정동적인 사회적 생산(혹은 삶정치적 생산) 그 자체로 재정의하는 순간, 그리고 생산활동의 기반과 산물이 공통적인 것임을 긍정하는 순간, 욕망은 개체적인 성격을 벗어던지며 무한성 콤플렉스에서 해방된다. 욕망의 무한성이 ‘죄악’으로 규정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정된 자원’이라는 근대 정치경제학의 틀 속에서이다. 그 틀에서는 마치 ‘산 노동’이라는 존재론적 지평이 ‘생산적 노동’이라는 정치경제학적인 (그것도 근대 산업자본주의에 국한되는) 특정 범주에 억눌려 있듯이, 힘의 표현으로서의 욕망(‘하고자 함’)이 결핍으로서의 욕망에 억눌려 있다. 우리가 욕망을 허위의식으로 규정하고 무찔러야 한다면, 그것은 ‘무한’해서가 아니라 ‘결핍’(이데올로기에 의한 허구적 결핍이든, 실존적 결핍이든)으로서 사고되기 때문이다.
노동과 욕망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은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을 위해 제출되고 있는 노동유인/생산유인의 문제로 이어진다. 저자는 곽노완의 사회연대소득 모델을 기본소득의 실제적 상으로서 적극 수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두 사람에게 실현가능성이란 곧 “21세기 코뮌주의 분배원리는 도덕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지속가능하다는 것”(7쪽)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공장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 생산유인에 대한 논의는 현실적인 중요성을 띨 수도 있다. 산업생산이 헤게모니를 갖는 조건 속에서 기본소득에 의해 일종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면, 즉 기본소득만으로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에서 이탈하는 일이 속출한다면, 적절한 유인을 마련함으로써 노동과 욕망을 통제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의 생산조건은 노동과 욕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이 새로운 해석에 대한 생산주체들의 요구 또한 날로 커져만 가고 있다.
산 노동과 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점점 흐려지고 있는 (그래서 부의 생산이 점점 측정불가능해지고 있는) 오늘날, 기존의 노동범주로부터의 탈주는 더 이상 ‘해이’나 ‘나태’가 아니며, 욕망은 더 이상 ‘결핍’이라는 유인을 통해 통제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생산유인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가치론에 대항하는 기본소득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논의의 출발점을 ‘기본소득이 도입되고 나면’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여기로 돌려 오랫동안 우리를 결박해온 노동가치론을 어떻게 붕괴시킬 것인가를, 그리고 바로 그 속에서 노동운동과 문화운동이 어떻게 선순환을 이룰 수 있을까를 함께 모색해야할 것이다. 여기서 함께 뛰어보자.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imirreducible.tistory.com/trackback/128
지필묵 2011/05/19 01:17
* 2008년 중앙대 사회학과 집담회를 위해 쓴 짤막한 글이다.
* 그때 나는 대학원수료생이었고, 지금 나는 논문제출기한을 넘겼는지 넘기기 직전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학생에게 임금을! : 학문후속세대에서 수업노동자로
나는 1983년에 태어나 1999년에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다 1년 후 자퇴를 했고 2003년 또래보다 1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좌파적 감수성을 유지하면서 학부시절을 보냈고, 졸업 직후 극우파들이 ‘빨갱이사관학교’라고 치켜세워주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2006년 4월에 소위 연구조교 생활을 시작했고, 그 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2년 동안 학진의 녹을 먹었다. 그 사이에 영어시험과 종합시험과 프로포절 심사를 거쳤고, ‘준비중’이라는 대답만 1년 가까이 하면서 논문을 미뤄오다 요즘 겨우 마음을 잡았다. 2008년 11월 현재 나의 상태는 석사수료생. 예치금을 내야 책을 빌릴 수 있고, 늦어지는 논문 때문에 지도교수를 피하게 되고, ‘논문은 어떻게 돼 가냐’라는 질문과 ‘졸업하고 어떻게 할 생각이냐’라는 질문을 동시에 받는, 그러면서도 그것에 조금씩 무뎌져가는 대학원수료생이다. 이상이 ‘학문후속세대’로서의 나의 연대기이다.
그러나 모든 연대기에는 외전이 있는 법. 나는 대학원생으로 살아온 시간동안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시 논문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내가 남발했던 ‘준비중’이라는 대답은 사실 대부분 면피용이었다. 나는 프로포절 통과 후 논문을 쓰고도 남았을 1년이라는 시간동안 ‘딴 짓’을 하고 있었다. 논문의 참고문헌과 한참 동떨어진 『앙띠 외디푸스』를 강독했고, 영어가 아닌 에스페란토와 라틴어를 공부했다. 또 죽었다 깨어나도 등재지가 될 수 없는(그리고 될 필요도 의지도 없는) 「자율평론」을 편집했고, 대항대학을 표방하는 <다중지성의 정원>을 함께 만들어 학생이자 강사이자 만사(만드는 사람)로 활동했다. 이처럼 나는 소위 제도권과 비제도권이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을 동시에 경험했던 것이다.
여기서 제도권과 비제도권이라는 구분을 사용하는 것은 양자를 경쟁시켜서 택일을 종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날 그 사이를 횡단하고 있는 학문후속세대의 처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실제로 제도권에 적을 두고 있는 많은 학문후속세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비제도권과 네트워킹되어있다. 제도권과 비제도권 간의 배타적인 구분이 극명해진 것은 신자유주의가 진행되면서부터이다.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대학에 대한 자본의 포섭과 훈육이 날로 심해지면서, 획일적인 지식생산구조(학부의 경우는 산학협력체제, 대학원의 경우는 학진체제)에 염증을 느낀 학문후속세대들이 비제도권 교육공간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를 ‘지식인의 죽음’과 ‘떠오르는 대중지성’으로 부르며 대결구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도권과 비제도권 사이에서의 배타적 택일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인 지식생산구조 속에서 유실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말이다.
우리를 지칭하는 ‘학문후속세대’라는 용어는 사실 나에게 낯설면서도 불편한 표현이다. 학문후속세대라는 말에는 뭔가 유예되고 있는 듯한 느낌과 재생산에 대한 강박, 그리고 자조 섞인 동일시(identification)와 구별짓기(distinction)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학문후속세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학생’이라는 사회적 존재가 띠는 모호성 때문일 것이다. 40년 전 유럽의 대학생들은 이미 이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투쟁의 모호함
학생으로서 가지는 우리의 조건은 특권자라는 사실이다. 대학 기구의 역할은 앞으로 우리를 유능한 지배의 조직자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데 있다. 대학은 이익 수단이다. 우리는 그 봉사의 댓가로서 간부가 되어 이 이익의 일부분을 분배받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학 개량 활동은 필연적으로 현대 사회의 착취를 강화시킨다. 때문에 우리는 자기 모순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대학은 졸업장 공장이다. (중략) 학생은 완성되어가는 생산품이며 대학과 사회의 관계란 원칙적으로 전혀 배제된 관계에 서 있다. 학생은 미래에 완성품으로서 사회의 일원이 된다고 하는 점에서 지금은 사회의 일원일 수 없다. ‘미래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학생을 사회의 계층적 상황으로부터 배제시키고, 초월적 존재로 묶도록 근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모욕을 우리는 특권으로 감사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런가.
학생의 지위
현재 학생의 지위는 학생들에 의해 두 가지 결함이 지적되고 있다.
1. 학생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는 점
2. 학생이 고립되어 있다는 점
구좌파 진영에서 굳이 68혁명을 쁘띠부르주아지의 혁명이라고 폄하하지 않았더라도, 혁명의 당사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지위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모욕을 당하고 있는가. 학생이라는 지위, 학업이라는 활동은 과연 우리의 사회적 삶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가. 우리는 구좌파의 의심어린 눈초리처럼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착취로부터 유예된 노동자로, 고등교육이라는 특혜를 받는 특권층으로, 혹은 아카데미라는 온실 속에서 ‘한창 좋을 때’를 누리고 있는 철없는 이등시민으로 너무 간단하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너무나 일면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한 표현으로, ‘수업노동’이라는 다소 낯선 용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수업노동은 보통 ‘학업’, ‘학교공부’ 등으로 번역되어왔던 스쿨워크(schoolwork)라는 단어를 재전유한 것이다. 학업은 교육서비스라는 형태로 생산된 가치를 단순히 소비하기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또 다른 지적 가치를 생산하는 수업노동이다. 우리가 쓰는 발제문, 텀페이퍼, 나아가 학위논문을 생각해보라. 학교도 전공도 다른 사람의 논문에 인용되어 있는 자신의 논문,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블로그에 스크랩되어있는 자신의 글을 생각해보라. 더욱 미시적으로 보면 우리가 수업시간에 나누는 토론, 발제문이나 책의 한 귀퉁이에 해 둔 메모조차도 우리의 사유 속에 남아 새로운 사유를 창조한다. 이처럼 우리의 수업노동은 인류의 지식과 정보를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노동을 하면서 우리가 받는 임금은 고작 학점과 학위이다. 우리는 오히려 1년에 천만 원에 달하는 학비를 ‘지불’해야 하며, 수업노동을 재생산하기 위한 생활비 역시 각자 해결해야한다. 학업의 교환가치화는 졸업 이후로 유예되어있거나 아르바이트라고 불리는 극도의 불안정노동 속에서만 구현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나는 지적 노동을 주장함에 있어서 저작권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반동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가장 정교화한 것이 바로 등재지와 비등재지를 차별하는 학진과, 등재지 투고횟수와 SCI 지수를 점수로 환산하여 임용심사에 반영하는 대학이 아니던가. 이것이 낳은 결과는 ‘연구자가 아니라 논문기계가 되어버렸다’는 비참한 자아비판뿐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고립된 개인으로 사고하는 것과 맞서 싸워야한다. 우리의 노동을 사회적 노동이 아닌, 개인의 총명함이나 부지런함으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와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글을 쓰거나 토론을 하면서 인용하는 무수한 지식들을 떠올려보라. 우리가 가치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 즉 수업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생산물은 결코 사적 소유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산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68혁명의 대학(원)생들처럼,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업노동자들의 파업처럼 사회적 임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야한다. 제한적인 장학금, 한시적인 프로젝트 지원이나 유토피아적인 안정적 고용전망과 같은 개인들 간의 경쟁의 산물이 아닌, 최소한의 보장소득으로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요구해야한다. 이것이야말로 공적자금에 대한 진정한 재전유이다. 가사노동을 위해 투쟁했던 선배들처럼 외쳐보자. 학생에게 임금을!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imirreducible.tistory.com/trackback/122
지필묵 2011/05/04 16:02
삶정치적 기본소득을 위하여
은혜 (연구공간 L)
“우리의 자연상태는 실로 다중의 공통적 네트워크 속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 네그리․하트
디킨즈의 소설 『어려운 시절』(1853)에는 ‘숫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씨씨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사실’을 가르치는 데 혈안이 된 학교에서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는 ‘지진아’이다. 씨씨는 ‘국가의(national)’ 부를 ‘자연의(natural)’ 부라고 잘못 말해놓고 “같은 얘기 아닌가요”라고 천진하게 묻는다. 그는 “국가에 오천만 파운드의 돈이 있다면 부유한 나라인가”라는 선생의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해 핀잔을 듣는데,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누가 돈을 갖고 있는지, 그 중 얼마라도 제 돈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면 부유한 나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시민 백만명 중 일년에 스물다섯명만이 굶어죽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굶어죽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백만명이든, 백만명의 백만배이든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 십만명의 선원 중 오백명만이 죽었다면 비율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죽은 사람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무조건적 기본소득’(이하 기본소득)은 우리에게 ‘사실’로 주어진 것을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그리고 나아가 새로운 사실을 창조하는 기획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소녀의 ‘어리석음’은 기본소득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는 자연의 부로부터 국가의 부를 추상해낼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의 부가 자연의 부에서 발생한 것임을 직관해내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백분율을 계산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부의 측정불가능성을 감지해내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기본소득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갖춰야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이라는 기획은 부와 그것의 생산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전제하는 동시에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전제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것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기본소득이 전제하는 것은 오늘날 생산이 더 이상 노동가치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했으며, 적대의 선이 임금관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부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본소득을 ‘분배정의’나 ‘인권’의 문제로 여기든 ‘자본에 의해 수탈된 것의 환수’로 여기든, 부의 분배에 앞서 부의 발생을, 즉 부의 생산 메커니즘을 다루는 데서 출발해야한다. 생산 메커니즘에 대한 고찰은 우리가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근거를 밝히는 것이기에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나아가 우리는 새로운 생산 메커니즘으로의 이행이라는 전제를 검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의 생산에 기여하는 모든 이들의 자율로 기본소득을 이끌어야 한다. 기본소득이 이러한 생산의 이행을 전제하고 있는 한, 그것은 사실상 자신에게 부과된 ‘기본’이라는 제한을 언제든지 벗어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제한을 걷어내는 과정은 기본소득이 갖는 정치적 함의의 진폭과 방향을 바꿔놓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기본소득의 정치적 함의는 구체적인 정책이나 경제학적 모형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정치학자 캐롤 페이트먼(Carole Pateman)이 강조하듯, 기본소득을 보는 관점을 “개인의 기회로서의 자유”에서 “자치나 자율성”으로, 그리고 그 “실현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에서 “정치적 상상력”을 펼치는 것으로 옮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글에서 제시하는 기본소득은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기획이자 운동으로서의 기본소득, 즉 삶정치적(biopolitical) 기본소득이다.
초과 : 삶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
이탈리아 기본소득네트워크의 부대표인 안드레아 푸마갈리(Andrea Fumagalli)는 기본소득을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권력으로서 조명하는데, 그는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맥락에서 “노동에 대한 보수(remuneration)가 삶에 대한 보수로 번역”된 것으로 규정한다. 즉 임금이라는 포드주의적 보수에서 ‘실존의 소득’(income of existence)으로의 이행인 것이다. 이때 투쟁은 고임금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취직 여부와 관계없는 지속적인 소득을 요구하는 싸움이 되며, 이것은 곧 노동시간과 삶시간을 분리해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고 그는 설명한다. 이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생산의 이행’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의가 사회적 요구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이행이 잠재적인 것으로서만 머물지 않고 현실적인 것으로서도 충분히 경험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기본소득이 전제하고 있는 생산의 이행은 네그리와 하트의 작업에서 심도 깊게 전개되어 왔다. 『제국』, 『다중』, 그리고 『커먼웰스』(Commonwealth)로 이어지는 그들의 작업은 지구화라는 맥락에서 생산의 탈근대화와 그것의 동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 작업의 첫 결실인 『제국』에서 그들은 생산의 탈근대화를 ‘생산의 정보화’라는 맥락에서 고찰하면서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삶정치적 생산을 예비적으로 검토한다. 여기서 정보화는 단순히 통신망과 같은 기반시설이나 스마트폰 같은 하드웨어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컴퓨터라는 보편적 도구의 확보를 지적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컴퓨터화가 가져오는 노동의 재구성이다. 일례로 스마트폰이라는 하나의 생산물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스마트폰이라고 부르는 것은 특정한 부피와 무게, 모양을 가진 유형의 내구재 그 이상이다. 우리는 그와 동시에,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수많은 창조적 활동들과 그것이 가져올 (그리고 이미 가져온) 새로운 사회적 현상들을 항상 염두에 둔다.
‘유비쿼터스’라는 말이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전개된 생산의 정보화는 노동의 재구성에 있어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임금노동 안에서의 변화이다. 오늘날의 임금노동은 반드시 노동시간에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메일링부터 브레인스토밍까지 근무시간 이후에 사무실 바깥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비일비재해졌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언제 어디서 떠오를지 알 수 없는 생산적 아이디어들과 언제 어디서 이루어질지 모르는 마주침들을 그때그때 알맞게 처리하고 증진시킬 수 있는 환경이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잔업’이나 ‘야근’과 같은 임금노동의 언어로는 포착할 수 없는, 미시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노동행위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강력하고 근본적인 변화는 임금노동의 외부에서 일어났다. 과거에는 비노동으로 분류되었던 활동들이 갖는 생산적 힘이 현대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활동들은 언어․이미지․코드 등의 형태로 통신망을 흘러다니면서 누군가에게 이른바 정보와 써비스로서 작용한다. 여기서 내구재로서의 스마트폰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일시적인 마디일 뿐,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인간활동의 상호작용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정보 및 써비스 재화는 내구재와 달리 관련업체를 통해서만 생산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애용하고 감탄해마지 않는 포털싸이트의 지식제공 써비스를 보자. 그 써비스는 해당업체가 제공하는 것인가. 여기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해당업체가 적어도 지식교류의 장은 제공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조차도 광고수주와 직결되는 우리의 클릭행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처럼 정보경제의 키워드인 유비쿼터스는 곧 생산이 유비쿼터스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러한 노동의 재구성을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라고 칭하며, 그것의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그들은 먼저 “노동과정의 실재적 동질화”, 즉 이질적인 구체적 노동이 추상적 노동(맑스가 말하는 ‘인간 노동력 일반의 지출’)의 지위를 획득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대공업체제의 구축을 통해 일정정도 실현되었던 이 동질화는 정보화와 비물질화 이후 더욱 완벽히 실현되었는데, 특히 노동과정이 근대적 산업생산의 장소인 공장을 벗어나 사회적 삶 전체로 흘러넘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것은 단순히 작업장의 수와 종류가 증가했음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근대적 산업생산의 틀에서 확고히 분리되었던 이른바 생산의 장소와 소비의 장소가 구별 불가능한 정도로 겹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임금노동이 노동시간을 초과하여 일어날 뿐만 아니라 삶시간 전체가 생산시간이 되고 있다는 점, 즉 노동과 비노동이 더 이상 구별 불가능하다는 점이 핵심인 것이다.
다음으로 그들은 비물질적 노동의 정동적(affective) 측면에 주목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생산물의 쓰임은 더 이상 그것의 물리적 형상과 기능에만 국한되지 않는데, 그것은 단순히 생산의 결과가 비물질적 형태를 띤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더 나아가 그러한 결과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접속과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이것은 감정노동 또는 돌봄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범주화된 써비스업에서 ‘고객응대’가 평가항목으로서 강조되고 ‘직원소양교육’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고객과의 통화내용을 감청당하는 콜센터의 상담노동자들을 떠올려보라.) 이처럼 노동에서 정서작용이 갖는 중요성은 오늘날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더욱 핵심적이 되고 있다. 이는 이러한 정서작용이 순간적인 기분이나 감정에 머물지 않고 생산성과 직결되는 활력의 증감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비물질적 노동의 정동적 측면은 『다중』에서도 계속해서 강조되고 있다. 『다중』에서 나타나는 비물질적 노동의 새로움은 협력을 사고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서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와 함께 협력이 “노동활동 자체에 완전히 내재적”임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다중』에서 그 내재성은 ‘노동의 공통되기’로 표현된다.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가 전면화된 오늘날 협력은 구체적 노동형태들의 합 이상이다. 그 초과의 지점은 바로 공통의 삶과 새로운 주체성의 생산에 있다. 생산의 시간이 곧 삶시간이 되고 생산의 장소가 사회적 삶 전체로 확장되어 ‘장소 아닌 장소’(non-place)가 되고나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마디들이 생산의 주체가 되며 각각의 특이한 삶은 서로를 깊숙이 침투하고 전염시키면서 공통의 삶을 이룬다.
특이성들의 공통되기를 통한 사회적 삶의 생산, 이것이 바로 삶정치적 생산의 중요한 한 측면이다. 삶정치적 생산은 먼저 시간의 측면에서 고용된 시간, 즉 노동시간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장소의 측면에서 그것은 더 이상 작업장(그곳이 근대적인 산업노동의 장소인 공장이든, 탈근대적인 비물질적 노동의 장소인 매장이나 사무실이든)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가치의 측면에서 삶정치적 생산은 부를 교환가치의 원천이지만 결코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즉 항상 가치법칙을 초과하는 것으로 마주한다. 척도(시간적․공간적 측정과 정치경제학적 가치법칙)를 초과하고, 생산과 소비의 구분은 물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구분까지 무력화하는 부는 그야말로 ‘삶정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적 부가 취하는 형태가 바로 ‘공통적인 것’이다.
생산이 척도를 초과하고 있다는 것은 적대 역시 척도를 초과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과거 산업생산의 시대에 적대는 임금관계에 기반한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적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임금관계는 생산이 삶정치적으로 일어나는―내구재뿐만 아니라 지식이나 정보 같은 비물질적 재화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공통의 삶과 새로운 주체성이 생산되는―오늘날 붕괴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재생산에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필요노동시간과 자본가에 의해 전유되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잉여노동시간의 분할, 그리고 필요노동의 잉여노동에의 종속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삶정치적 생산에서는 이제 “공통적인 것이 잉여가치의 장소”이다. 산업생산의 시대에 불변자본이 수행한 생산물로의 가치이전은 실제로 삶정치적 생산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오늘날 경제를 떠받치는 두 기둥인 금융과 부동산의 경우, 자본은 가치 생산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다. 금융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수많은 자료들을 분석하는 지적 활동이며, 그 자료들은 사람들의 취향․소비패턴․신용도 등 모두 공통적인 것에 기반하고 있다. 부동산은 어떠한가. 부동산의 가치를 발생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왕래, 거기서 일어나는 마주침들과 사건들, 입소문 등 공통적인 것 그 자체이다.
이처럼 오늘날 자본은 점점 생산의 조직화의 외부에 있게 되고, 그만큼 생산은 자본으로부터 점점 자율적이 되어간다. 그래서 오늘날 자본이 행하는 공통적인 것의 전유는 착취라기보다 수탈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하는 (고용된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제 자본과의 적대는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임금노동자들의 투쟁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와 노동의 강제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생산자들의 투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본소득이 주요한 투쟁의 장으로 부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적대 : 공통적인 것과 소유의 공화국
생산의 비물질적․정동적 측면을 강조해온 네그리와 하트는 최근작인 『커먼웰스』에서 삶정치적 노동의 기술적 구성(technical composition of biopolitical labor)을 고찰함으로써 삶정치적 생산에 대한 논의를 보다 정교화한다. 그들은 생산활동 그 자체와 생산의 시간, 생산의 공간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부터 삶정치적 생산이 갖는 세 가지 경향을 도출해낸다. 그것은 바로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생산활동 자체), ‘노동의 여성화’(생산의 시간), ‘이주와 혼합’(생산공간)이다.
삶정치적 생산의 첫 번째 경향은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이다. 우리는 앞서 『제국』에서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로 정식화되었던 이 경향이 『다중』을 거치면서 비물질적/삶정치적 생산의 헤게모니로 정교화되는 과정을 살펴본바 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지적․정동적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체성의 생산에 있었는데, 『커먼웰스』에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생산”(로버트 보이어 Robert Boyer), “인간발생적 모델”(크리스찌안 마라찌 Christian Marazzi) 등의 표현을 통해 한층 더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고정자본이 되고 '삶 형태(forms of life)'의 생산이 부가가치의 토대가 됨을 의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산의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무너지고, 공통적인 것이 “생산적 힘이자 생산된 부가 취하는 형태”로서 나타난다.
삶정치적 생산의 두 번째 경향은 노동의 여성화이다. 이때 ‘여성화’라는 표현은 세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먼저 양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여성노동력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질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노동의 시간적 유연성을 가리킨다. (물론 이것은 남녀 모두에게 동일하다.) 끝으로 헤게모니적 측면에서 그것은 이른바 ‘여성의 일’로 분류되어왔던 노동이 점점 중심적이 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여성의 일이 정동적 노동으로서 갖는 특질에서 기인한다. 그러한 특질로 인해 오늘날의 생산은 상품생산에 그치지 않고 삶 형태와 관계들의 생산으로 확장되며, 이로써 생산과 재생산, 그리고 노동시간과 삶시간 의 구분이 불가능해진다. 즉 노동의 여성화는 공통적인 것의 시간적 자율을 함축한다.
마지막으로 삶정치적 생산의 세 번째 경향은 이주와 혼합이다. 이때 이주와 혼합은 인종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동시에 내포한다. 그것은 양적인 측면에서 노동시장을 전지구적인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 질적인 변화 중 하나는 인종적 갈등이며, 다른 하나는 이주노동 안에서 ‘저렴하고 유연한 여성노동력’(노동의 여성화)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주와 혼합이라는 경향은 이처럼 인종적․젠더적 위계를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적대와 탈주의 지점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오늘날 생산의 공간은 장소 아닌 장소이기에, 이주와 혼합이 낳는 효과는 그것이 초국적이든 일국적이든 단순한 장소적 확장을 넘어선다. 그것의 핵심은 살아있는 존재들과 삶 형태들의 마주침 혹은 관계, 다시 말해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있다. 즉 이주와 혼합은 공통적인 것의 공간적 자율을 함축한다.
자본은 이러한 각각의 경향에 대응하는 지배전략을 펼친다. 먼저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에 대한 대응은 공통적인 것에 대한 통제로 드러난다. 통제양식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내포적으로는 “생산의 공통적 기초를 분할하거나 고갈시키고” 외연적으로는 금융을 통해 “공통적인 것의 산물들을 사유화”한다. 그러나 이 전략은 공통적인 것을 파괴함으로써 삶정치적 노동의 생산성을 감소시킨다. 지금까지 살펴본 생산의 이행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경제는 그야말로 ‘삶정치적’이기 때문에 생산적 힘이자 그 산물인 공통적인 것을 파괴하는 것은 현대 경제의 기초와 동력을 제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공교육 지원금의 삭감과 지적소유권 침해에 대한 감시와 처벌 등은 자본이 공통적인 것을 파괴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자본은 노동의 여성화가 가져온/올 시간적 자율을 통제하기 위해 ‘노동유연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불안정하게 만든다. 자본은 이제 노동시간을 늘림으로써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에서 언제나 노동할 준비가 되어있도록 만듦으로써 노동자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노동이 갖는 생산적 힘은 정동적 측면에 있기 때문에, 그것의 생산성은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잘 발휘될 수 있다. (스스로 조직할 시간을 박탈당한 ‘멀티잡’의 노동자를, 그리고 그가 수행하는 생산 및 재생산의 질을 생각해보라.) 이처럼 자본은 시간을 빼앗음으로써, 즉 시간의 빈곤을 초래함으로써 삶정치적 노동의 생산성을 파괴한다.
끝으로 자본은 이주와 혼합이 가져온/올 공간적 자율을 통제하기 위해 공간적․사회적 장벽들을 세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국경의 강화(국경수비의 강화든 법률적 제재의 강화든)로, 다른 한편으로는 일국 내의 인종적 차별이나 사회문화적 차별로 나타난다. (2005년 프랑스 방리우 봉기는 후자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적 폐쇄와 사회적 위계 역시 모순을 낳는데, 그것은 삶정치적 노동의 생산성과 직결되는 특이성들의 마주침과 그것의 평등한 관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은 이동을 통제함으로써, 즉 공간의 빈곤을 초래함으로써 삶정치적 노동의 생산성을 파괴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노동과 자본의 적대는 공통적인 것과 소유의 공화국 사이의 적대로 번역할 수 있다. 그것은 디킨즈가 씨씨의 목소리를 빌어 말하고 있는 ‘자연의 부’와 ‘국가의 부’의 적대이다. 자연의 부와 국가의 부가 ‘같은 얘기 아니냐’는 그의 질문은 국부를 공통적인 것에서 분리해내려는 시도를 겨냥하고 있다. 이때의 부는 주권(그것이 일국적이든 초국적이든)에 의해 사적인 것(the private)과 공적인 것(the public)으로 양분된 부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달리 일자의 소유로 나타난다. 사적인 부가 원자화된 개인의 소유라면, 공적인 부는 국가라는 일자의 소유이다. 따라서 공적 소유는 사적 소유의 다른 형태일 뿐이며, 공적 소유가 가져오는 것은 (흔히 공공의 이익이라고 기만적으로 불리는) 주권의 이익이지 공통의 이익이 결코 아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계급투쟁은 공통적인 것과 소유의 공화국 사이의 적대로 드러난다.
공통적인 것과 소유의 공화국 사이의 적대 속에서, 기본소득은 공통적인 것과 그것의 항구적인 (시간적․공간적) 자율을 위한 기획으로서 자리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분석한 삶정치적 생산의 세 가지 경향은 이미 『제국』에서부터 제시되어온 바 있는 다중의 세 가지 요구와 겹쳐진다. 즉 이주와 혼합에 대한 대응으로 야기된 공간의 빈곤에 맞서 ‘지구시민권’을, 노동의 여성화에 대한 대응으로 야기된 시간의 빈곤에 맞서 ‘보장소득’을,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에 대한 대응으로 야기된 공통적인 것의 파괴에 맞서 ‘재전유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삶정치적 생산의 세 가지 경향 및 요구 중 두 번째를 정확히 관통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을 진정 삶정치적 것으로 구상하기 위해서는 다른 두 경향과 반드시 접속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 세 경향을 서로 접속시키기 전에, 먼저 ‘자본의 대응’과 ‘다중의 요구’ 사이의 관계부터 다루고자 한다. 이것은 운동으로서의 기본소득을 구상함에 있어 필수적인 작업이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소유의 공화국의 대응과 그 모순은 단순히 자본의 자기혁신과 자기모순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본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끊임없이 혁신하게 만드는 동력임을 자주 간과한다. 그래서 자본의 변형은 자기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과대평가되거나 자기모순이라는 이름으로 과소평가된다. 이러한 관점은 (자본을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적대와 모순을 계급투쟁이 아닌 자본의 자기운동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적실하지 못하다.
여기서 우리는 오뻬라이스모(Operaismo)의 역사관으로부터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오뻬라이스모 이론가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맑스의 테제를 이어받아 계급투쟁의 동학을 재구성했는데, 그것은 더 이상 적대하는 두 힘의 종합으로 귀결되는 변증법적 운동이 아니다. 거기에는 종합의 계기는 사라지고 두 힘의 각축과 왕복만이 남는다. 즉 “한편으로는 투쟁이 자본의 재구조화를 결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구조화가 미래의 투쟁의 조건들을 결정”하는 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구성-탈구성-재구성의 투쟁주기를 이루는데, 여기서 ‘계급관점의 역전’(마리오 트론띠 Mario Tronti)이 일어난다. 출발점(구성)은 자본이 아니라 우리이며, 대응(탈구성)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자본이다.
구성 : 기본소득의 삶정치화
이제 우리는 삶정치적 생산이라는 ‘구성’(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 노동의 여성화, 이주와 혼합)과 그에 맞선 자본의 ‘탈구성’(공통적인 것의 파괴, 시간의 빈곤, 공간의 빈곤)에 이어, 다중의 세 가지 요구라는 ‘재구성’(지구시민권, 보장소득, 재전유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삶정치적 생산의 두 번째 경향을 관통하는 기본소득은 다른 두 경향과 함께 재구성의 계기로서 직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개체의 재생산에 머물지 않고 공통적인 것의 재생산으로 나아갈 때만이 삶정치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접속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첫째, 기본소득과 지구시민권의 접속은 기본소득의 수급자격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있다. 그 접속은 기본소득운동의 궤적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기본소득의 핵심적 덕목인 무조건성―심사와 노동의무가 없이 지급되는―이 시민권의 강도를 보장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본소득운동의 지구적 네트워킹이 시민권의 외연을 조금씩 확장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에서 ‘누가 그것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현실화된 기본소득 모델들은 일국적 규모로 설계된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국적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주민에게는 일정한 체류기간을 자격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엄밀히 말해 현실에서의 기본소득은 무조건적이지 않은 것이다.
기본소득과 지구시민권은 국가간 경계와 사회적 위계라는 분할선 모두를 넘어서는 문제이며, 기본소득이 진정으로 삶정치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에 어떠한 장벽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도의적인 주장이 아니다. 삶정치적 생산은 마주침과 소통, 관계 속에서 증진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장벽의 철폐는 생산성의 측면에서 매우 절실한 과제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와 지구시민권에 대한 요구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동시적으로 뒤얽히면서도 선순환을 이룸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그에 대한 자율적 통치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기본소득과 재전유권의 접속은 기본소득의 수급형태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접속은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틀인 ‘분배’ 개념을 넘어선다. 기본소득을 분배로서 실천하는 것은 소유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부의 할당을 좀더 정의롭게 수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효수요 창출의 메커니즘으로 기획되어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복무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오늘날 사회적 부가 이미 공통적이며 삶정치적(정동적)이기 때문에, 주로 화폐의 형태를 전제하는 경제적 (재)분배라는 용어는 점점 불필요해지고 있다. 이제 수탈된 것의 환수는 분배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용’이자 ‘향유’로서 나타나며, 그 사용 혹은 향유는 소유가 아니라 ‘접근’이라는 방식을 취한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소유에 기반한 분배 개념이 어색해지는 지점까지 기본소득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기본소득이 ‘기본’이라는 제한을 벗어던지는 기획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공통적인 것에 주목함으로써 ‘기본’이라는 문턱을 넘어설 수 있다. 삶정치적 생산이 무르익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은 더 이상 기본, 즉 ‘최소한’이 적용되기 힘든 상황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기본’이 한계가 되는 이유는 공통적인 것 중에서도 인공적인 공통적인 것(the artificial common)의 영역에서 쉽게 발견된다. 정동에 기반한 비물질적 생산물들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무한히 복제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을 설정하지 않고도 소득으로서 충분히 보장될 수 있다. 그에 따르는 현실적 어려움은 소유의 공화국이 자행하는 디지털 엔클로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의 기술적 실현가능성과 별개로 공통적인 것이 갖는 특질이다. 정보, 아이디어, 노하우, 이미지 등 인간의 접속 및 상호작용의 산물과 그 활동 자체에는 권장량이나 평균치가 없다. 이것은 공통적인 것 자체는 물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욕망 역시 척도를 넘어서 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어도 사라지거나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기 때문에 욕망을 제한해야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공통적인 것(the natural common)은 어떠한가. 하트는 저항과 운동의 관점에서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와 인공적 형태를 절합함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모색한다. 그는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와 인공적 형태가 일견 상반된 논리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인공적 형태가 창조․개방성․무한성으로 특징지워지고 인간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다면, 자연적 형태는 보존과 한계로 특징지워지며 인간/동물 세계보다 더 넓은 이해관계의 장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차이가 모순적이지 않고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하트에 따르면 이 두 형태는 두 가지 논리적 특징을 공유하는데, 첫 번째 특징은 두 형태 모두 소유관계를 거부하며 그에 의해 약화된다는 점이다. 인공적 형태가 더 이상 배타적 소유관계를 유지할 수 없고 사유화하는 즉시 생산성이 떨어지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렇다면, 자연적 형태는 그것의 효과가 소유관계를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후자는 자연재해와 같은 부정적 효과들을 떠올리면 즉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재해는 계급과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지배적인 가치척도를 초과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양적 초과가 아니라 척도 자체에 대한 거부이다. 앞서 금융과 부동산의 메커니즘을 살펴보았듯이, 오늘날의 경제는 철저히 공통적인 것에 기반하고 있다. (경제학자들과 회계사들은 척도를 초과하는 공통적인 것을 ‘외부성’과 ‘무형자산’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측정불가능성은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데, 그것은 첫 번째 특징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정적 효과를 통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즉 재해는 소유관계를 초월하여 영향을 미치며, 그로 인해 파괴된 삶 형태는 전혀 측정불가능하다. (뉴올리언즈와 아이티에서 파괴된 삶을 떠올려보라. 씨씨가 말했듯이 몇 명이 목숨을 잃든 그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이처럼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는 소유관계와 가치척도에 대한 거부를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면 축적은 사적인데 생산과 피해는 공통적이라는 점이다. 즉 모순은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관계와 공통적인 것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이 두 형태는 근본적으로 삶 형태의 생산에 주목한다는 강한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그 차이들의 절합(공통되기)은 “자율을 위한 정치적 행동과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운영을 연결시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제 다시 ‘기본’이라는 문턱을 응시하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우리는 소유관계와 가치척도를 거부하는 공통적인 것에 대해 소유권이 아닌 접근권을 주장해야 하며, 화폐형태로 지급되는 소득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것에 대한 무조건적 접근권’ 역시 소득으로서 쟁취해야한다. 이것은 소유의 공화국에 의해 파괴된 공통적인 것을 치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특히 지적소유권의 강화와 교육의 부패에 대한 치유는 매우 중요하다. 지적소유권의 강화는 삶정치적 생산의 원료이자 수단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교육의 부패는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인 주체성의 생산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이다. 공통적인 것이 생산적 힘이자 그 산물이 된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에, 지식과 교육에 대한 접근은 단순히 ‘써비스’를 제공받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수탈된 것의 환수일 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재전유이다.
이러한 접근은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4대강이나 성미산을 장악하려는 소유의 공화국의 시도는 공통적인 것의 파괴이자 접근권의 봉쇄이다. 4대강과 성미산을 지키려는 운동은 발전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적 발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발전을 주장하고 있다. 이 운동에서 발전은 그곳에 서식하는 동식물과의 공존부터 휴식이나 자연학습까지, 모두 공통적인 것의 발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마주침들은 언어가 되고 이미지가 되어 또 다른 삶 형태를 창조한다. 이처럼 공통적인 것의 자연적 형태와 인공적 형태는 이미 자연과 문화라는 근대적 도식이 적용 불가능할 정도로 뒤얽혀있다. 따라서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모든 형태를 소유가 아닌 접근의 방식으로 재전유해야 한다.
삶정치적으로 재구성된 기본소득을 통해 우리가 되찾아야하는 것은 결국 (생산물이 취하는 형태이자 생산활동 그 자체로서의) 공통적인 것이며, 이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코뮤니즘의 구축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소득이 가져오는 효과인 동시에 기본소득운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기획이다. 바로 그 때문에 기본소득은 저항과 운동의 관점에서 지구시민권 및 재전유권과의 접속을 통해 재구성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삶정치적으로 재구성된 기본소득을 위한 운동은 임금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으로도, 당사자 중심의 신사회운동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그럼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당사자가 되는 새로운 운동이다. 즉 모든 정체성과 그에 따른 이해관계들이 극복되는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movements)’인 것이다.
기본소득의 삶정치적 재구성을 통한 코뮤니즘의 구축은 기본소득을 정치경제학의 영역에서 인류학의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임금에서 소득으로의 이동은 (그 소득이 비록 제한적으로 구성된다 할지라도) 인간의 자연상태에 대한 오랜 불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것은 곧 ‘한정된 자원’과 ‘무한한 욕망’이라는 근대적인 정치경제학적 전제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때 한정된 자원은 배타적이며 측정가능한 부를, 무한한 욕망은 부의 결핍에 의한 욕망을 가리킨다. 그러나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에 이러한 틀은 시효를 다했다. 이제 자원과 욕망은 ‘공통적이며 측정불가능한 부’와 ‘특이해지려는 욕망'으로 재정의되어야 하며, 우리의 자연상태는 특이성들의 공통되기를 통해 끊임없이 구성되는 것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기획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과 즉각 연결된다. 이 새로운 인류, 새로운 주체성을 무엇이라 불러야할까. 네그리와 하트가 제안하듯이 다중이나 빈자로, 아니면 빈자-다중(multitude of the poor)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무엇으로 명명하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난이 갖는 힘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가난은 척도의 가난이며, 벤야민이 말한 경험의 가난이다. 경험의 가난은 우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데로 이끈다”는 점에서 “새로운 긍정적인 개념의 야만성”이다. 우리의 경험―가치법칙, 임금관계, 소유관계, 그리고 다른 모든 위계와 분할 등―이 더 이상 아무런 생산적 힘을 갖지 못하는 지금, 이러한 경험의 가난을 토대로 삶정치적 기본소득이라는 전혀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실험하는 우리는 새로운 야만인들이다. 그리고 그 구상과 실험은 코뮤니즘으로 가는 관문이 아니라, 코뮤니즘의 새로운 시작이다.
tags : COMMONWEALTH,
L,
the common,
공통적인 것,
기본소득,
네그리,
노동가치론,
다중,
마이클 하트,
보장소득,
부,
비물질노동,
삶정치적 생산,
새로운 야만,
생산,
소유,
어려운 시절,
운동들의 운동,
자본,
자연상태,
재전유권,
접근권,
정치경제학,
제국,
지구시민권,
코뮤니즘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imirreducible.tistory.com/trackback/121
지필묵 2010/08/10 03:05
Politics of the Common
By Michael Hardt, July 6th, 2009
[Contribution to the Reimagining Society Project hosted by ZCommunications]
- 공통의 부에 대한 대안적 운영(management)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공통적인 것은 두 가지 모습을 띤다. 생태학적/자연적 형태(이하 NC)와 사회·경제적/인공적 형태(이하 AC).
- 저항과 운동(activism)의 관점에서 두 가지 형태의 관계를 고찰해보자.
- 양자는 동일한 논리를 따르는데, 그것은 소유관계를 거부하며 그에 의해 약화된다는 점에 있다. 나아가 양자는 경제적 가치의 전통적 척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 대신 유일하게 유효한 가치화의 척도(scale), 즉 ‘삶의 가치’를 부과한다.
- 양자의 분할은 삶정치적 관점에서 흐려진다.
- 양자가 상반된 논리를 따르는 경우가 있다.
(1) NC가 보존과 한계에 주목한다면, AC는 창조, 개방성, 무한성에 주목한다.
(2) NC가 인간/동물세계보다 더 넓은 이해관계의 장을 갖는다면, AC는 인류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 양자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순적 관계가 아니라 잠재적인 보완물이다. [UN기후회담을 둘러싼 행동들]
- 삶정치적 생산의 전제
(1) 생산의 중심성[헤게모니]이란 생산의 다른 부문에, 그리고 사회적 삶에 부과된다는 점에 있다. 즉, 과거에 산업생산이 중심성을 가진 것은 그것이 산업‘경제’만이 아니라 산업‘사회’를 창조했다는 데 있다.
(2) 이제 산업생산은 더 이상 위계적 위치를 점하지 않는다. 즉, 다른 부문들과 사회 전체에 부과되지 않는다.
(3) 이제 중심성은 비물질적 생산에 있다. 인지적·정동적 도구들, 임금관계의 불안정하고 비보장적인 성격, 비물질적 생산의 시간성(노동일 개념의 파괴).
- 이러한 생산은 ‘삶정치적’이다. 생산이 ‘삶정치적’이라는 것은 생산이 궁극적으로 사회적 관계들과 삶 형태를 생산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삶정치적 생산에서는 생산/재생산의 구분이 사라진다.
- 이것은 생태학적 담론과 삶정치적 생산의 근접성을 보여준다. 양자 모두 삶 형태의 생산/재생산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양자의 중요한 차이는, 생태학적 관점의 경우 ‘삶 형태’에 대한 생각을 인간/동물에 제한시키지 않고 더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 재산형태의 위계 : 산업생산 이전 시대에는 이동불가능한 재산 중심이었던 반면, 산업생산 시대에는 이동가능한 재산 중심, 즉 상품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비물질적 재산이 물질적 재산을 지배한다. 비물질적 재산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은 비물질적 생산의 중심성이 높아짐을 증명한다.
- 전산업생산에서 산업생산으로의 이행에서는 이동성이 중요했던 반면, 산업생산에서 삶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에서는 배타성(exclutivity)과 재생산성(reproductivity)이 중요해진다. 삶정치적 생산에는 (1)희소성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고, (2)무제한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하며, (3)개방적으로 공유되더라도 유용성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잠재력이 높아진다.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
(1) 지배적인 형태로 출현하는 생산형태는 일반적으로 비물질적/삶정치적 재화로 귀결되는데, 이것은 공통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적이고 재생산 가능하며 점점 배타적 통제가 어려워진다.
(2) 미래의 경제발전에 있어 그러한 재화들의 생산성은 공통적이 되는 데 의존한다. 사적인 것으로 유지시키는 것은 새로운 것의 생산에 무익하며 그것을 저해한다. 자본은 (역설적으로) 점점 공통적인 것에 의존한다.
<공통적인 것의 두 가지 논리적 특징>
(1) 소유관계를 거부하고 그것에 의해 약화된다.
- 비물질적 소유형태는 배타적 권리를 지키기 어려우며, 사적인 것으로 만들면 생산성이 떨어진다.
- 생산의 핵심에서 강력한 모순이 출현하는데, 그것은 생산성을 위한 공통적인 것과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한 사적인 것의 충돌이다.
- NC 역시 소유관계를 거부한다. 환경적 효과들(그것이 이로운 것이든 해로운 것이든)은 항상 소유관계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유관계에 의해 약화된다. 축적의 사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피해는 사회적(보편적)이다. => 생산의 공통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사적 성격 사이의 갈등. [볼리비아 물․가스 투쟁]
(2) 지배적인 가치척도를 초과한다.
-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외부성”. 회계사들이 말하는 “무형자산”.
- 가치척도를 초과한다는 것은 양적 초과가 아니라 척도체계 자체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 삶정치적 재화의 가치화에서 금융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생산의 새로운 지배적 형태들을 포착하는 데 무능하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 오늘날 경제적 재화와 활동의 가치가 전통적 척도를 초과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 생산에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 NC 역시 측정불가능하며 척도에 순응하지 않는다. 온난화나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파괴된 삶 형태의 가치는 측정불가능하다. 교토의정서 등 각종 협약들은 공통적인 것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측정하지 못한다. 다만 아주 간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해치고 부패시키는 가스의 생산에 화폐적 가치를 할당할 뿐이다. => 삶 형태는 측정불가능하다. 아마도 그것은 삶의 가치에 기반한, 근본적으로 다른 척도를 따를 것이다. 이것은 창안되어야 한다.
-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들이 모두 소유관계에 저항하듯, 양자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전통적 척도를 거부한다. 양자가 공유하는 특질들은 자율을 위한 정치적 행동과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운영을 연결시키는 데 토대를 구성한다.
- 공통적인 것의 정치
(1) NC : 희소성과 한계에 관한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아주 많은 사람들을 지속(생존)시키면서도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재생산된다.(The common can only sustain so many people, for instance, and still be successfully reproduced.) 지구, 특히 야생의 공간은 산업적 발전과 여타의 인간행위들이 주는 피해에 맞서 지켜져야 한다. <보존과 한계>
(2) AC : 생산의 무제한적 성격을 강조한다. 아이디어, 정동 등을 포함한 삶 형태의 생산에 고정된 한계란 없다. 물론 그것은 더 많은 아이디어가 반드시 더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희소성의 논리 하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제한 없는 창조적 잠재력>
- 공통적인 것을 위한 투쟁들 사이에 있는 기본적 갈등들
(1) NC는 발전에 반대하고 AC는 발전에 찬성한다? : 이것은 너무 단순한 관점이다. 두 경우에서 다뤄지는 발전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즉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생산과 관련된 발전은 산업적 발전과 분리되기 때문이다.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전통적 분할이 붕괴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나면, <보존>에 대한 요구와 <창조>에 대한 요구가 반대되지 않고 상보적임을 더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인간의 이해관계가 준거틀이 될 경우 : AC는 인류의 이해관계를 중시하지만, NC는 인류를 넘어 생태 전체(비-인간의 이해관계까지)를 다룬다.
메모 : NC를 사고할 때 필요한 관점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이다. NC의 영역에서 강조되는 <보존>은 접근 금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인위적 보존(가령 그린벨트)이 아니라, NC의 자기재생산 능력의 보존이다. 산업생산과 다른 접근, NC의 자기재생산 능력을 해치지 않는 공통적 접근이 필요하다.[성미산투쟁] 이것은 바꿔 말하면 ‘인류를 위해 자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가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가’라는 관점이다.
- 이러한 차이는 넘어설 수 없거나 파괴적인 차이가 아니다. 이것은 운동에서나 이론에서나 양자에게 이롭다. 지구의 한계와 다른 삶 형태(비-인간 영역)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대면하는 것이 사회적 투쟁에 집중하는 이들에게 유익하듯, 사회적 위계의 성격과 그 위계와 싸울 수단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대면하는 것은 환경에 집중하는 이들에게 유익하다.
-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정치가 직면하고 있는 몇몇 핵심쟁점들을 명명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 공통적인 것을 놓고 투쟁하는 것과 그것을 운영할 대안적 수단들을 창안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를 재구상하는 기획에 있어 근본적이다.
- 공통적인 것의 두 측면의 분기와 차이들은 절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차이 자체는 건강하며 우리를 전진시킨다.
- UN기후회담에 주목. 환경운동가, 반자본주의운동, 다른 사회운동들의 합류.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imirreducible.tistory.com/trackback/111
지필묵 2010/06/01 01:46
성문종합영어를 보면서 울컥하게 될 줄이야..
인종차별의 날카로운 화살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기다려"라고 말하기 쉬울 겁니다.
그러나 악랄한 군중들이 당신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제멋대로 린치를 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그리고 당신의 형제 자매들을 마음대로 익사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혐오에 찬 경찰이 당신의 흑인 형제 자매들을 저주하고 발로 차고 폭행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의 여섯살짜리 딸에게 방금 TV에서 광고한 공공놀이공원에 왜 갈 수 없는지를 설명하려고 할 때 갑자기 혀가 꼬이고 말을 더듬게 되는 걸 느낀다면, 유색어린이들은 "놀이동산"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딸의 조그만 눈에 눈물이 솟는 것을 본다면, 딸의 어린 마음의 하늘에 열등감이라는 우울한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면, 그리고 딸이 무의식적으로 자라나는 백인에 대한 원한으로 자신의 어린 인격을 망가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면,
"백인", "유색인"이라고 적힌 성가신 표시에 날마다 굴욕을 당한다면,
계속 발끝으로 선 채로 살면서 당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에 낮에는 괴롭힘당하고 밤에는 망령에 쫓긴다면,
당신이 타락한 의미에서의 "보잘것없음"과 영원히 싸우고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왜 우리가 기다리기 어려운지를 이해할 겁니다.
- 마틴 루터 킹, "우리가 기다릴 수 없는 이유"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imirreducible.tistory.com/trackback/110
지필묵 2010/04/25 03:29
푸에르토리코 대학 점거 선언문

인문학부는 당신의 것이자, 그/녀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참여와 협력으로 가득찬 활발하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자. 경쟁과 우려라는 국가 및 행정부의 태도를 바꾸고 협력, 열정, 젊음의 환희로 대체하자.
현존하는 권력구조들이 이미 균열을 일으켰고 자신의 안티휴머니스트적 의제들을 드러내었으니, 현재와 미래는 사랑과 행동에 대한 호소로 채워져야할 것이다. 우리의 학문공간들은 권력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며, 그것은 해방의 도구로서 환수되어야 한다. 휴머니스트들인 우리는 모든 종류의 가능한 세계들을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다. 이 가능한 세계들을 현실로 바꿀 때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고자, 우리를 분리시키고 소외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떨쳐내고자 학부를 점거하고 있다. 그러한 죽음 대신 우리는 우리 입에 채워진 재갈을 벗어버리기로,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형성되었음을 세계에 알리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생각하고 성찰하고 비판하는 다중이다. 우리는 심장박동이 주먹과 입맞춤의 상호작용으로 다져진 세대이다.
이것은 대학을 지키자는 호소가 아니라, 수평적이며 위계적이지 않은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새로운 어떤 것으로 다시금 의미를 부여하자는 호소이다.
우리의 행동은 다양함에 대한 호소이며, 우리의 교육공간을 정의하는 복수성에 대한 호소이다. 그것은 새롭고 상이한 세계들, 나라들, 도시들, 다중들, 공간들에 기여하는 모든 유형의 풍부한 지식 전체이다.
우리는 위기와 주변화의 자녀이며, 억압과 약탈의 경제체제의 자녀이다. 우리는 참여를 비난하고 위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정치체제의 후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권리들을 위한 길을 개척한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 절멸에 직면해있는 그 혜택들을 위해 땀과 피를 지불한 사람들의 기나긴 전통의 계승자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이 우리가 세우고자 노력해온 것을 갖도록 푸에르토리코 대학을 탈환하는 중이다. 그것은 지식의 다양성,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그리고 우리가 창조하기로 선택하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관점들의 다양성이다.
국가와 대학 행정부가 공유하고 있는 재정적 집착은 교육을 소비재의 생산라인으로 생각한다. 인문학은 생산라인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기적 임금인상에 따른 제거대상이 되었다.
인문학이 제공하는 것이자 국가와 대학 행정부가 무시하기로 한 것은, 비판적으로 될 기회,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할 기회, 소리·색깔·퍼포먼스의 세계에 형태를 부여할 기회, 우리의 말과는 다른 말로 쓰여질 기회이다. 교육은 자본의 좁은 시선이나 시장의 변덕스런 기분을 통해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교육은 고분고분한 주체와 무비판적인 자동기계를 재생산할 뿐이다.
그 기계를 부셔버리자!
우리는 교수와 학생 간의 협력적 유대 속에서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낳는, 해방적이고 유익한 교육을 제안한다.
우리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 즉 가르치는 사람들과 배우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교육을 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동사[가르치다, 배우다]를 선생과 학생에게 부과된 역할과 혼동하지 말자. 그것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교육은 써발턴과 주변화된 사람들을 학문의 주체로 포함해야 한다. 이주민,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여성, 남성, 나이가 많은/적은 사람.
이러한 참여적·민주적 교육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학문과 그 주체들 간의 강한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연대는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으로가 아니라, 옆에서 구축된다.
옆사람을 안아주고 그/녀의 귓가에 당신이 그들의 존재를 긍정하며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이라.
상상과 변화의 결실을 낳을 기름진 토양에 내린 뿌리들처럼 우리의 몸을 서로 뒤얽자.
우리 손으로 존엄과 존중의 풍경을 그리자.
걱정하지만 말고 옆에 서라! 점거하라!
http://emancipating-education-for-all.org/manifesto_upr_en
twitter @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imirreducible.tistory.com/trackback/108
지필묵 2010/04/20 19:36
| '노동'의 기술적 구성 |
자본의 대응 (통제방식)
|
다중의 요구 |
| 비물질적 생산의 헤게모니 |
공통적인 것을 파괴하기
|
재전유권 |
| 노동의 여성화 |
불안정성(precarity) = 시간의 빈곤
|
보장소득 |
| 이주와 사회적 혼합 |
인종적·사회적 장벽들 = 공간의 빈곤
|
전지구적 시민권 |
구성 탈구성 재구성
Trackback 0
:
Trackback Address :: http://imirreducible.tistory.com/trackback/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