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에 해당되는 글 72건

  1. 2011.05.17 Bruce Cockburn - Call It Democracy
  2. 2011.03.29 나는 아이리쉬 록 버전의 <잊을게>를 듣고 싶다 3
  3. 2011.02.15 늦은 일기 1
  4. 2011.02.04 좌충우돌 번역 일기 : 화면보호기로 투표를 한다고?? 1
  5. 2010.10.01 <연구공간 L> 1주년을 자축하며
  6. 2010.08.26 William Blake's "The Tyger"
  7. 2010.08.19 "도끼로 뿌리를 치자"
  8. 2010.08.10 Michael Hardt, "Politics of the Common" 노트 4
  9. 2010.06.01 마틴 루터 킹, "우리가 기다릴 수 없는 이유" 5
  10. 2010.04.25 [번역] Manifesto: occupation at the University of Puerto Rico (korean translation) 4

Bruce Cockburn - Call It Democracy

흥얼흥얼 2011. 5. 17. 16:04


메일링리스트 Money_Banks_Crisis에서 받아본 글.
메일제목이 'A Song for DSK'였는데 아마도 도미니끄 스트라우스-칸을 겨냥한 듯하다.
이렇게 좋은 노래가 DSK 따위를 조롱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다니 좀 슬프다.
암튼 메일링리스트로 유통시켜준 분께 감사. :)
 
* Bruce Cockburn in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Bruce_Cockburn



Uploaded by  on 11 Sep 2008

"Call it Democracy" is perhaps the only song ever written about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which Cockburn accuses of fostering "insupportable debt" in Third World countries. Typically not pulling any punches, Cockburn charges that the IMF doesn't "really give a flying fuck about the people in misery." That earned it a few bleeps on radio and video channels, but no one seemed to notice the chorus, "IMF, dirty MF." We won't spell out here what "MF" stands for, but it can easily be imagined."





Padded with power here they come
International loan sharks backed by the guns
Of market hungry military profiteers
Whose word is a swamp and whose brow is smeared
With the blood of the poor

Who rob life of its quality
Who render rage a necessity
By turning countries into labour camps
Modern slavers in drag as champions of freedom

Sinister cynical instrument
Who makes the gun into a sacrament --
The only response to the deification
Of tyranny by so-called "developed" nations'
Idolatry of ideology

North South East West
Kill the best and buy the rest
It's just spend a buck to make a buck
You don't really give a flying fuck
About the people in misery

IMF dirty MF
Takes away everything it can get
Always making certain that there's one thing left
Keep them on the hook with insupportable debt

See the paid-off local bottom feeders
Passing themselves off as leaders
Kiss the ladies shake hands with the fellows
Open for business like a cheap bordello

And they call it democracy
And they call it democracy
And they call it democracy
And they call it democracy

See the loaded eyes of the children too
Trying to make the best of it the way kids do
One day you're going to rise from your habitual feast
To find yourself staring down the throat of the beast
They call the revolution

IMF dirty MF
Takes away everything it can get
Always making certain that there's one thing left
Keep them on the hook with insupportable debt

 

:

나는 아이리쉬 록 버전의 <잊을게>를 듣고 싶다

사는 얘기 2011. 3. 29. 16:54

지난 일요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나는 가수다>가 전파를 탔다. 프로그램의 만듦새도 그렇지만, 2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중간광고 없이 방송되는 걸 보니 사태를 수습하겠다는 제작진의 결의가 느껴졌다. 주말 황금시간대에, 그것도 대중의 이목이 일제히 집중된 상황에서 광고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꼼짝 않고 본방사수를 하고나서 든 느낌은 개운함보다는 찝찝함, 정확히 말하자면 서글픔이었다. 특히나 정엽의 탈락은 '의연하다', '쿨하다'라는 세간의 평가로 상쇄될 수 없는 서글픔을 안겨주었다. 탈락 자체가 서글플 것은 없다. 정엽 자신이 '이제 앨범 준비할 수 있겠다'고 말했듯, 이제 그 무겁던 짐을 내려놓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또 해야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그럼 무엇이 날 서글프게 만들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탈락 자체가 아니라 탈락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정엽은 YB의 <잊을게>를 미션곡으로 받고 자신이 평소 도전해보고 싶었던 장르라고 밝혔다. 그리고 중간평가 때 아이리쉬 록 스타일로 편곡한 정엽의 <잊을게>가 공개되었다. 나는 '브라운 아이드 쏘울', 즉 한국적 (넓게는 아시아적) 쏘울의 대표주자인 정엽의 변신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의 공연은 다듬어지지는 않았을지언정 구태의연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이승열만이 거의 유일하게 구현하고 있는, 윤도현이 말했듯 U2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리쉬 록 특유의 분위기가 정엽의 독특한 음색으로 빚어지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신선했다. 

그러나 중간평가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좋지 못한 게 아니라 '꼴찌'를 했다. 매니저 개그맨들이 위태로운 가수를 점찍으면서 일제히 정엽을 걱정한 것은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료가수들의 평가 역시, 청중으로서의 평가라기보다는 대중의 반응을 거의 무조건반사처럼 예측하게끔 훈련된 경험 많은 가수로서의 그것에 가까웠을 것 같다. '평소에 꼭 해보고 싶던 장르이지만 쉽지가 않다', '어설퍼지는 것 같다'고 토로하던 정엽은 결국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장르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가장 잘 하는'이라는 말은 뒤집으면 '늘 해왔던'이라는 뜻이 된다. 그의 공연을 보고 나는 너무나 속상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가수 정엽, 그 음색, 호흡, 테크닉은 모두 그대로였지만, 국내 최정상의 세션맨들과 악기, 음향장비도 모두 그대로였지만, 그의 공연은 무미건조했다. 그 공연을 보는 동안 내 머리 속에 그려진 것은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결혼식 피로연 장면이었다. 상투적으로 로맨틱한, <아메리칸 아이돌>의 싸이먼 코웰 식으로 얘기하면 호텔 라운지에서나 들을 법한 그런 공연이었다.  

그리고 정엽은 '꼴찌'를 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기왕에 떨어질 거 처음에 한 대로 아이리쉬 록 버전에 도전해볼 걸, 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는 왜 과감하게 '실험'을 하지 못한 걸까. 내가 느낀 서글픔은 여기에 있다. 과감한 실험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구도, 탈락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실험만을 허용하는 구도.   

다른 가수들이 미션에 임하는 모습도 서글프긴 마찬가지였다. 중견가수 백지영이 리허설에서 머릿 속이 백지장이 되는 경험을 하고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고,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해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국민가수 김건모가 마이크 쥔 손을 파르르 떨었다. 이소라는 공연을 진행하면서 '잘 하는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음'을, 그것이 '경쟁을 통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글쎄, 난 너무 서글펐다. 마치 내가 쌔디스트가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SM플레이를 끝낼 수 있을까.

김건모의 재도전 사태(?)로 일주일 내내 시끄러운 걸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다른 모든 뉴스들이 묻힐 정도로 이렇게 회자될 정도라면 그냥 써바이벌 형식을 버리고 공연만 하면 안되나, 라는 생각을. 물론 그것은 시청률 싸움에서 이겨야 하고 광고도 '완판'시켜야 하는 상업방송의 생리와는 맞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생각이 그다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가수다>의 핵심 컨셉 중 부정적인 측면인 '써바이벌'을 버리고 긍정적인 측면인 '미션'만 취하면 어떨까. 시즌제를 도입해서 7명이 한 시즌을 지지고 볶으며 실컷 놀고, 다음 시즌에는 또 다른 7명이 새 시즌을 꾸려나가는 방식은 어떨까. 그래서 이 프로그램의 역사가 쌓여서 10주년 리유니온 같은 걸 하면 어떨까.

나는 떠난 정엽을 비롯한 7인의 가수에게 아직도 듣고 싶은 게 너무나 많다. 팝을 부르는 것도 듣고 싶고, OST를 부르는 것도 듣고 싶다. 팀을 짜서 콜라보레이션 배틀을 하는 것도 보고 싶고, 자기 음반의 B side를 소개하는 것도, 내 인생의 노래를 소개하는 것도 보고 싶다. 진짜 파격은 165분 편성이나 써바이벌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작진이 자부하던 공연의 질 자체에 있다. 탈락이라고 표현하든 양보라고 표현하든 누군가가 '아웃'됨으로써 담보되는 질이 아니라, 가수의 자유롭고 새로운 실험을 통해 담보되는 질 말이다.

이런 파격을 꿈꾸며 한 달을 기다려보련다. 어떤 형식으로 재정비되든 첫 무대는 정엽의 <잊을게> 아이리쉬 록 버전이었면 좋겠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풀 버전은 듣고 보내야지. 



:

늦은 일기

NUDA POTENZA 2011. 2. 15. 07:11

부산에서 맞는 일요일.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다.

고향집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보수동 책방골목이 나온다.
(동네이름이 보수동이라니... 부산에 살 땐 너무나 익숙해서 몰랐는데 지금은 좀 징그럽다.)
1박2일에서 이승기가 다녀갔다더니 그래서일까. DSLR을 둘러멘 사람들이 꽤 보였다.

책 몇 권을 사고 국제시장을 가로질러 자갈치시장으로 갔다. 
표지판 노선도에 한진중공업이라고 적혀있는 버스는 30번과 66번이다.
한진중공업이 워낙 규모가 큰 곳이라 태종대행 버스는 모두다 들르지 싶었지만,
어느새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 된 나는 그냥 안전하게, 혹은 소심하게 정류장 이름이 노출된 버스를 기다렸다.

십수대의 버스를 보내고 드디어 30번 버스에 올랐다. 
변함없이 터프한 부산 버스를 몸을 싣고 영도다리를 건넌다.
신공항 유치를 위한 현수막이 부산 시내에 빼곡하더니만 영도도 예외가 아니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에 섰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차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대학 1학년 때가 생각났다.
2003년, 부산으로 놀러온 동아리 사람들과 태종대에 갔다오던 길. 휘날리던 붉은 깃발과 울려퍼지던 쟁가.
그리고 피서객의 모습을 하고서 그 광경이, 그 소리가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던 나.
'체제순응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운동권'은 아닌, 
'좌파', '저항', 'ㅈ같은 자본주의', 뭐 이런 눈곱만큼의 감수성만 갖고 있던 시절의 나. 

횡단보도를 건너니 약간 살벌한 광경이 펼쳐졌다.
회사 정문을 가로막고 있는 25인승 정도 될 법한 버스는 유리창이 모두 박살나 있었던 것.
차마 그 모습을 찍진 못하고 건너편 건물을 찍는데, 경비아저씨가 보안 때문에 찍으면 안된다고 한다.
(그때는 약간 아니꼬왔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아저씨의 태도는 생각보다 상당히 상냥했다.)

  


'아, 네.'

대충 끄덕이고 고개를 돌리니 경비실 앞에 삼삼오오 불을 쬐는 분들이 보인다. 
근데 사수대인지 구사대인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난감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누가 봐도 소위 '외부인' 같은 젊은 남녀가 통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좀 껴서 들어가보려고 인사를 했다. 

'서울에서 온 학생인데요. 고향 내려왔다가, 어쩌고 저쩌고...'
'아, 저희도 통화해보고 있어요.'

출입절차는 민망할 정도로 간단했다. 그냥 출입기록만 작성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도 소속에 연구공간 L이라고 당당하게 기록했다.)
함께 들어간 분들은 민노당 <진보정치> 기자분들이었다.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못하고...)
당원도 아니고 단체회원도 아니고 그냥 혼자 왔다고 하니까 약간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괜찮다. 이제는 익숙하다.)

오른쪽으로 꺾어들어가자 농성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전기를 들고 뛰어다니던 꼬마 아이들이 다부진 억양으로 갑자기 말을 건다.

'용화상이 뭐에요?'
'응? 용화상?'

아빠가 뭔가를 알려줬나본데 무전이라 잘 못 들은 것 같았다. 한 아이가 무전기 너머에 있는 아빠에게 재차 묻는다. 

'용화상이 뭐야?'
'영화 틀어주니까 가라고.'
'영화? 우와!'

아이들은 신이 나서 어디론가 뛰어갔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니 평택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이젠 이름도 가물가물한 아이들.. 많이 컸겠지.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친구도 있겠구나.

농성장을 메운 현수막과 자보, 띠, 편지들은 마치 악귀를 막아주는 금줄처럼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한쪽에는 사수대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아, 김진숙님이 자랑하던 군고매가 저기서 구워졌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크레인.



크레인을 보자마자 숨이 탁 막혔다. 
어찌나 높은지 어지간히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카메라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다.
김진숙님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조차 안됐다.
기자라면 이것저것 물어라도 보겠지만, 
듣보잡 시민? 학생! 트위테리안! 삶정치적 활동가!!인 나는 그마저도 너무나 조심스럽다.
그냥 쥐죽은 듯이 글귀들을 읽어나갔다. 



제발로 내려가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잠그고 올라온 문이지만 제 힘으론 저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제가 걸어내려가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 때
여러분들은 문 여는 법을 잊지 말아주세요.




글로 감동주지 못하고
말로 감동주지 못해요
그냥 이 자리 말없이 지켜나갈게요 ^^
사랑해요 아주 많이 ^^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겠다 싶어 다가갔다. 
그래, 제일 만만한 게 학생이고 트위테리안이다. (삶정치적 활동가는 너무나 많은 맥락을 요하니까..)
아까처럼 '서울에서 공부하는 학생인데 고향에 왔다가 와봤어요'라며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한 분이 '트위터에서 보셨어예?'라고 묻는다.
'네, 트위터에서 소식 접하고 있어요. 물 드시기 시작한 것도 트위터에서 보고 알았어요.'
다른 분은 막걸리를 권하시고, 또 다른 분은 쏘세지를 권하신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숫기 부족으로 먹진 못했다.)

저녁에 문화제가 예정되어있어지만,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했다.
이만 가보겠다고 죄송하다고, 대신 트위터로든 뭐로든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진보정치> 기자분들께도 인사를 드리는데 인터뷰 해주시던 분(아마도 노조간부)이 저녁 먹고 가라고 하신다. 
나는 숫기 부족과 시간 부족으로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억수로 맛있는데... 나는 분명히 대접할라캤다'며 농을 던지셔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는 속으로,
'얼른 좋은 날 와서 숫기고 나발이고 벗어던지고 막걸리며, 쏘세지며, 군고매며 편하게 먹고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인사했다.






건너편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고 나오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남성들이 야광봉 같은 걸 들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함께 건너던 영도 주민들이 수군거렸다. 

한진중공업은 직장폐쇄를 단행했고, 또 다른 2명의 노동자가 크레인에 올랐다. 

그리고 폭설이 왔다.




:

좌충우돌 번역 일기 : 화면보호기로 투표를 한다고??

사는 얘기 2011. 2. 4. 19:58

연구공간 L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관한 편역서를 준비하고 있다.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나름 대규모 프로젝트인데, 그중 닉 다이어-위데포드(Nick Dyer-Witheford)의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이라는 글은 예외적으로 서진과 내가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저.히.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부분과 맞닥뜨렸다. 


Some of the most dramatic implications of this networked socialization of production tools bear on the new terrestrial commons of eco- and bio-spherical concerns. Large scale research projects such as the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global warming and climate change prediction and epidemic control, requiring vast calculative capacities, are being realised through (1)the myriad singular donations of unused computing cycles from individuals. Adopted on a very large scale, (2)this would amount to voting with one screensaver as to which programs of research to support ― a massive re-socialization of collective knowledge, an exercise of general intellect.


나는 (1)을 <개인들의 서툰 컴퓨터 사용/회전에서 나오는 무수히 많은 특이한 기여들>이라고 옮겼다. unused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현재) 사용하고 있지 않은’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리고 unused to sth 혹은 unused to doing sth의 형태로 사용할 때 ‘~에 익숙하지 않은/경험이 많지 않은’이라는 뜻을 갖는다. 나는 ‘사용 중이지 않은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to (doing) sth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음에도 <개인들의 서툰 컴퓨터 사용>이라는 번역을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일단) 택했다. 나는, 개인들의 컴퓨터 사용능력이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같은 문단에서 언급되고 있는) “엄청난 계산능력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연구프로젝트들”에 비해서는 조야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조야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인적인 사용들이 이룬 cycle이 알게 모르게 기여하는 바가 있나보다, 라고 막연하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2)였다. 도대체 화면보호기로 무슨 투표를 한다는 건가. ㅠ.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내용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뒷문장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번역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막막함과 괴로움 ㅡ.ㅡ 을 나의 번역파트너이자 멘토인 서진과 공유했다. 늘 내 부족한 실력을 메워주던 서진도 이번에는 난색을 표했다. 둘이서 머리를 싸매도 딱히 진전이 없었다. 맥락이 있을텐데, 뭔가 있을텐데, 라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점점 지쳐가던 우리는 그간 숱한 오탈자와 비문으로 우리를 괴롭혔던 저자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위데포드 지못미.. 그치만 당신이 한 짓도 만만치 않아.. ㅋㅋ)

그런데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여 뭔가를 부지런히 검색하던 이부장님이 얼마 후 자기 노트북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때 우리의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그거슨 SETI@home(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SETI@home(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은 SETI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분산 컴퓨팅 기술을 활용하여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들을 이용해 외계 지적 생명체를 탐구하는 프로젝트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1999년 5월 17일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버클리 네트워크 컴퓨팅을 위한 공개 기반(BOINC) 플랫폼에 속해 있다.

SETI의 기본 개념은 거대한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행성의 주파수 대역의 신호를 분석하여 특정한 반복 패턴을 보이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전파 신호를 가려내는 것이다. SETI는 천문학자 칼 세이건 원작의 영화 '콘택트' 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SETI의 전신인 오즈마 계획은 1960년대 부터 시작되었지만 50년 가까이 아무런 외계 지성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외계로부터의 신호는 전파망원경으로 수신한다. 전파망원경이 수신한 전파 신호 속에는 별의 탄생이나 블랙홀에서 나오는 호킹 복사 등 온갖 자연의 전파가 포함돼 있다. 여기서 인공적인 전파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높은 연산 능력의 슈퍼컴퓨터가 필요하게 된다. SETI@home은 전 세계에 연결된 개인용 컴퓨터가 구성하는 네트워크가 슈퍼컴퓨터의 역할을 하여 신호를 분석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세티 프로젝트(Search for Exteraterristrial Intelligence, SETI Project)에 대한 미 의회에서의 결정으로 국가 예산으로의 지원이 중단됨에 따라 프로젝트를 지속하기 위하여 단일 혹은 소수의 대용량 컴퓨터로 하는 분석이 아닌 전 세계에서 유휴중인 컴퓨터 자원을 활용하여 분석을 지속하기 위하여 분산 컴퓨팅(Distributed Computing)의 형태인 "@home(At Home, 집에서)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인터넷에 연결된 개인용 컴퓨터가 있다면 누구나 무료 소프트웨어를 다운로드 받아 실행시킴으로써 SETI@home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사용자 개인용 컴퓨터의 CPU, 디스크 공간, 네트워크 대역폭의 일부를 사용하여 작업한다. 일반적으로 사용자가 다른 작업을 하지 않을 때 화면보호기의 형태로 작동하며, 사용자가 자원의 사용 정도를 설정할 수 있다. 또는 처리 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화면보호기를 끄고 백그라운드로 작업을 진행하도록 설정할 수 있다.


<BOINC 기반 프로젝트들>

생물학

  • Cells@Home - 질병의 전이에 대한 연구.
  • 말라리아 통제 — 말라리아의 역학적인 확률론적 분석과 자연에서의 말라리아의 역사연구.
  • POEM@Home - 앤핀선의 도그마를 이용한 단백질 접이 모델.
  • Rosetta@home — 단백질 구조에 대해서 예측하고, 디자인하는 프로젝트.
  • SIMAP — 분산 컴퓨팅을 이용한 연속적인 유사성이 있는 단백질 데이터베이스 구축 프로젝트.
  • TANPAKU — 브라운 이론을 이용한 단백질 구조 예측.
  • World Commnuity Grid - BOINC를 이용한 여러 생물학 관련(에이즈 치료, 단백질 접힘, 뎅기열 치료)등을 연구하는 프로젝트.

지구 과학 

물리학 & 천문학

수학 [편집]





이 내용을 알게 되자 ‘화면보호기로 어떤 프로젝트를 지지할지 투표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외계어가 아니었다. 그래, 세상에 이런 게 있었어. ㅠ.ㅠ 우리는 우리의 무식함에 치를 떨면서 폭풍반성을 했다. 맨날 책이나 읽지 이런 건 하나도 모른다며... ㅋ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나름 만족스런 번역을 뽑아낼 수 있었다.


생산도구의 이러한 네트워크적 사회화가 갖는 가장 극적인 함의들 중 일부는 생태·생물권적 관심사인 새로운 지상의 공통재와 관련이 있다. 외계 지적 생명체에 대한 탐사, 지구온난 및 기후변화에 대한 예측, 전염병 통제와 같은 엄청난 계산능력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연구프로젝트들은, (1)화면보호기 상태에 있는 PC네트워크의 무수히 많은 특이한 기여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아주 큰 규모에서 보면, (2)어떤 연구프로젝트의 화면보호기 쏘프트웨어를 다운로드 받아 실행하는 것이 곧 그 연구프로젝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것과 같은 수준에 이르게 된다. 즉 이것은 집단적 지식의 대규모적 재사회화이자 일반지성의 실행인 것이다.


그래도 다듬어야할 부분이 있겠지만, 어쨌든 해피엔딩을 맞았다.

번역은 해당언어사전만으로 불가능하다는, 너무 당연하지만 자주 간과하게 되는 교훈을 되새기며. :P



thanks to 서진

special thanks to 종호 a.k.a. 이부장



:

<연구공간 L> 1주년을 자축하며

사는 얘기 2010. 10. 1. 17:47

노래 한 곡 띄웁니다. 
모두들 수고 많았고, 앞으로 더 수고합시다! 단, 즐겁게! :P







Seasons Of Love from "Rent"



ALL
Five hundred twenty-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Five hundred twenty-five thousand
Moments so dear.
Five hundred twenty-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How do you measure, measure a year?

In daylights, in sunsets, in midnights
In cups of coffee
In inches, in miles, in laughter, in strife.

In five hundred twenty-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How do you measure
A year in the life?

How about love?
How about love?
How about love? Measure in love

Seasons of love. Seasons of love

JOANNE
Five hundred twenty-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Five hundred twenty-five thousand
Journeys to plan.

Five hundred twenty-five thousand
Six hundred minutes
How do you measure the life
Of a woman or a man?

COLLINS
In truths that she learned,
Or in times that he cried.
In bridges he burned,
Or the way that she died.

ALL
It's time now to sing out,
Tho' the story never ends
Let's celebrate
Remember a year in the life of friends
Remember the love!
Remember the love!
Seasons of love!

JOANNE(while ALL sing)
Oh you got to got to 
Remember the love! 
You know that love is a gift from up above 
Share love, give love spread love 
Measure measure your life in love.



:

William Blake's "The Tyger"

리토르넬로 2010. 8. 26. 01:41




Arthur Quiller-Couch, ed. 1919. The Oxford Book of English Verse: 1250–1900.
  
William Blake. 1757–1827
  
489. The Tiger
  
TIGER, tiger, burning bright  
In the forests of the night,  
What immortal hand or eye  
Could frame thy fearful symmetry?  
 
In what distant deeps or skies          5
Burnt the fire of thine eyes?  
On what wings dare he aspire?  
What the hand dare seize the fire?  
 
And what shoulder and what art  
Could twist the sinews of thy heart?   10
And when thy heart began to beat,  
What dread hand and what dread feet?  
 
What the hammer? what the chain?  
In what furnace was thy brain?  
What the anvil? What dread grasp   15
Dare its deadly terrors clasp?  
 
When the stars threw down their spears,  
And water'd heaven with their tears,  
Did He smile His work to see?  
Did He who made the lamb make thee?   20
 
Tiger, tiger, burning bright  
In the forests of the night,  
What immortal hand or eye  
Dare frame thy fearful symm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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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로 뿌리를 치자"

NUDA POTENZA 2010. 8. 19. 02:31


"뿌리를 끊는 도끼"는 장작 패는 사람들과 물 긷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말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왔는데, 여기서 이 말은 세례요한이 계급적 오만을 향하여 퍼붓는 저주의 일부이다. 이 말은 또한 메시아와 불에 의한 세례에 대한 그의 고지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어구는 영국혁명에서 기꺼이 전유되었는데, 예를 들어서 지체 높은 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부를 빈자들에게 내놓으라고 명령한 아비저 콥은 그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도끼로 나무의 뿌리를 끊음"으로써 답했다. 세례요한의 혁명적 의미들과 "뿌리를 끊는 도끼"는 1790년대에 대서양의 양쪽에서, 복음주의자들과 세속적인 급진주의자들 모두에게서 부활되었다. 
(『히드라』, 474쪽)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장 7-12절



왕들, 사제들, 정치가들로부터 전쟁은 생겼다.
이들의 안전이 인간의 깊은, 덜어지지 않는 슬픔이고
이들의 화려함이 인간의 격하이다. 도끼로
뿌리를 치자, 독나무가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 독기운이 든 날숨이 
멸망, 죽음, 슬픔을 퍼뜨리는 곳에, 수백만 명이
뱀의 기근을 해소해주고 있으며, 그들의 뼈들이
독바람 속에서 묻히지 않은 채 바래가고 있는 곳에
정원이 세워지리라, 예쁘기가
이야기에 나오는 에덴을 능가하는. 

- Percy Bysshe Shelley, Queen Mab
(『히드라』, 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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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Hardt, "Politics of the Common" 노트

지필묵 2010. 8. 10. 03:05

Politics of the Common
By Michael Hardt, July 6th, 2009
[Contribution to the Reimagining Society Project hosted by ZCommunications]


- 공통의 부에 대한 대안적 운영(management)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공통적인 것은 두 가지 모습을 띤다. 생태학적/자연적 형태(이하 NC)와 사회·경제적/인공적 형태(이하 AC).

- 저항과 운동(activism)의 관점에서 두 가지 형태의 관계를 고찰해보자.
- 양자는 동일한 논리를 따르는데, 그것은 소유관계를 거부하며 그에 의해 약화된다는 점에 있다. 나아가 양자는 경제적 가치의 전통적 척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 대신 유일하게 유효한 가치화의 척도(scale), 즉 ‘삶의 가치’를 부과한다.
- 양자의 분할은 삶정치적 관점에서 흐려진다.

- 양자가 상반된 논리를 따르는 경우가 있다. 
  (1) NC가 보존과 한계에 주목한다면, AC는 창조, 개방성, 무한성에 주목한다.
  (2) NC가 인간/동물세계보다 더 넓은 이해관계의 장을 갖는다면, AC는 인류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 양자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순적 관계가 아니라 잠재적인 보완물이다. [UN기후회담을 둘러싼 행동들]

- 삶정치적 생산의 전제
  (1) 생산의 중심성[헤게모니]이란 생산의 다른 부문에, 그리고 사회적 삶에 부과된다는 점에 있다. 즉, 과거에 산업생산이 중심성을 가진 것은 그것이 산업‘경제’만이 아니라 산업‘사회’를 창조했다는 데 있다.
  (2) 이제 산업생산은 더 이상 위계적 위치를 점하지 않는다. 즉, 다른 부문들과 사회 전체에 부과되지 않는다.
  (3) 이제 중심성은 비물질적 생산에 있다. 인지적·정동적 도구들, 임금관계의 불안정하고 비보장적인 성격, 비물질적 생산의 시간성(노동일 개념의 파괴).

- 이러한 생산은 ‘삶정치적’이다. 생산이 ‘삶정치적’이라는 것은 생산이 궁극적으로 사회적 관계들과 삶 형태를 생산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삶정치적 생산에서는 생산/재생산의 구분이 사라진다. 
- 이것은 생태학적 담론과 삶정치적 생산의 근접성을 보여준다. 양자 모두 삶 형태의 생산/재생산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양자의 중요한 차이는, 생태학적 관점의 경우 ‘삶 형태’에 대한 생각을 인간/동물에 제한시키지 않고 더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 재산형태의 위계 : 산업생산 이전 시대에는 이동불가능한 재산 중심이었던 반면, 산업생산 시대에는 이동가능한 재산 중심, 즉 상품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비물질적 재산이 물질적 재산을 지배한다. 비물질적 재산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은 비물질적 생산의 중심성이 높아짐을 증명한다.

- 전산업생산에서 산업생산으로의 이행에서는 이동성이 중요했던 반면, 산업생산에서 삶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에서는 배타성(exclutivity)과 재생산성(reproductivity)이 중요해진다. 삶정치적 생산에는 (1)희소성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고, (2)무제한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하며, (3)개방적으로 공유되더라도 유용성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잠재력이 높아진다.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
  (1) 지배적인 형태로 출현하는 생산형태는 일반적으로 비물질적/삶정치적 재화로 귀결되는데, 이것은 공통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적이고 재생산 가능하며 점점 배타적 통제가 어려워진다.
  (2) 미래의 경제발전에 있어 그러한 재화들의 생산성은 공통적이 되는 데 의존한다. 사적인 것으로 유지시키는 것은 새로운 것의 생산에 무익하며 그것을 저해한다. 자본은 (역설적으로) 점점 공통적인 것에 의존한다.

<공통적인 것의 두 가지 논리적 특징>
  (1) 소유관계를 거부하고 그것에 의해 약화된다.
- 비물질적 소유형태는 배타적 권리를 지키기 어려우며, 사적인 것으로 만들면 생산성이 떨어진다. 
- 생산의 핵심에서 강력한 모순이 출현하는데, 그것은 생산성을 위한 공통적인 것과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한 사적인 것의 충돌이다. 
- NC 역시 소유관계를 거부한다. 환경적 효과들(그것이 이로운 것이든 해로운 것이든)은 항상 소유관계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유관계에 의해 약화된다. 축적의 사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피해는 사회적(보편적)이다. => 생산의 공통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사적 성격 사이의 갈등. [볼리비아 물․가스 투쟁]
  (2) 지배적인 가치척도를 초과한다.
-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외부성”. 회계사들이 말하는 “무형자산”.
- 가치척도를 초과한다는 것은 양적 초과가 아니라 척도체계 자체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 삶정치적 재화의 가치화에서 금융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생산의 새로운 지배적 형태들을 포착하는 데 무능하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 오늘날 경제적 재화와 활동의 가치가 전통적 척도를 초과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 생산에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 NC 역시 측정불가능하며 척도에 순응하지 않는다. 온난화나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파괴된 삶 형태의 가치는 측정불가능하다. 교토의정서 등 각종 협약들은 공통적인 것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측정하지 못한다. 다만 아주 간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해치고 부패시키는 가스의 생산에 화폐적 가치를 할당할 뿐이다. => 삶 형태는 측정불가능하다. 아마도 그것은 삶의 가치에 기반한, 근본적으로 다른 척도를 따를 것이다. 이것은 창안되어야 한다.

- 공통적인 것의 두 형태들이 모두 소유관계에 저항하듯, 양자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전통적 척도를 거부한다. 양자가 공유하는 특질들은 자율을 위한 정치적 행동과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운영을 연결시키는 데 토대를 구성한다.

- 공통적인 것의 정치
(1) NC : 희소성과 한계에 관한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아주 많은 사람들을 지속(생존)시키면서도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재생산된다.(The common can only sustain so many people, for instance, and still be successfully reproduced.) 지구, 특히 야생의 공간은 산업적 발전과 여타의 인간행위들이 주는 피해에 맞서 지켜져야 한다. <보존과 한계>
(2) AC : 생산의 무제한적 성격을 강조한다. 아이디어, 정동 등을 포함한 삶 형태의 생산에 고정된 한계란 없다. 물론 그것은 더 많은 아이디어가 반드시 더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희소성의 논리 하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제한 없는 창조적 잠재력>

- 공통적인 것을 위한 투쟁들 사이에 있는 기본적 갈등들
(1) NC는 발전에 반대하고 AC는 발전에 찬성한다? : 이것은 너무 단순한 관점이다. 두 경우에서 다뤄지는 발전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즉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생산과 관련된 발전은 산업적 발전과 분리되기 때문이다.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전통적 분할이 붕괴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나면, <보존>에 대한 요구와 <창조>에 대한 요구가 반대되지 않고 상보적임을 더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인간의 이해관계가 준거틀이 될 경우 : AC는 인류의 이해관계를 중시하지만, NC는 인류를 넘어 생태 전체(비-인간의 이해관계까지)를 다룬다.

메모 : NC를 사고할 때 필요한 관점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이다. NC의 영역에서 강조되는 <보존>은 접근 금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인위적 보존(가령 그린벨트)이 아니라, NC의 자기재생산 능력의 보존이다. 산업생산과 다른 접근, NC의 자기재생산 능력을 해치지 않는 공통적 접근이 필요하다.[성미산투쟁] 이것은 바꿔 말하면 ‘인류를 위해 자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가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가’라는 관점이다. 

- 이러한 차이는 넘어설 수 없거나 파괴적인 차이가 아니다. 이것은 운동에서나 이론에서나 양자에게 이롭다. 지구의 한계와 다른 삶 형태(비-인간 영역)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대면하는 것이 사회적 투쟁에 집중하는 이들에게 유익하듯, 사회적 위계의 성격과 그 위계와 싸울 수단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대면하는 것은 환경에 집중하는 이들에게 유익하다.

-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정치가 직면하고 있는 몇몇 핵심쟁점들을 명명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 공통적인 것을 놓고 투쟁하는 것과 그것을 운영할 대안적 수단들을 창안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를 재구상하는 기획에 있어 근본적이다.
- 공통적인 것의 두 측면의 분기와 차이들은 절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차이 자체는 건강하며 우리를 전진시킨다.
- UN기후회담에 주목. 환경운동가, 반자본주의운동, 다른 사회운동들의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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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우리가 기다릴 수 없는 이유"

지필묵 2010. 6. 1. 01:46


성문종합영어를 보면서 울컥하게 될 줄이야.. 



인종차별의 날카로운 화살을 느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기다려"라고 말하기 쉬울 겁니다.

그러나 악랄한 군중들이 당신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제멋대로 린치를 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그리고 당신의 형제 자매들을 마음대로 익사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혐오에 찬 경찰이 당신의 흑인 형제 자매들을 저주하고 발로 차고 폭행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의 여섯살짜리 딸에게 방금 TV에서 광고한 공공놀이공원에 왜 갈 수 없는지를 설명하려고 할 때 갑자기 혀가 꼬이고 말을 더듬게 되는 걸 느낀다면, 유색어린이들은 "놀이동산"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딸의 조그만 눈에 눈물이 솟는 것을 본다면, 딸의 어린 마음의 하늘에 열등감이라는 우울한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면, 그리고 딸이 무의식적으로 자라나는 백인에 대한 원한으로 자신의 어린 인격을 망가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면, 
"백인", "유색인"이라고 적힌 성가신 표시에 날마다 굴욕을 당한다면,
계속 발끝으로 선 채로 살면서 당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에 낮에는 괴롭힘당하고 밤에는 망령에 쫓긴다면,
당신이 타락한 의미에서의 "보잘것없음"과 영원히 싸우고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왜 우리가 기다리기 어려운지를 이해할 겁니다.  


- 마틴 루터 킹, "우리가 기다릴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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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Manifesto: occupation at the University of Puerto Rico (korean translation)

지필묵 2010. 4. 25. 03:29


푸에르토리코 대학 점거 선언문




인문학부는 당신의 것이자, 그/녀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참여와 협력으로 가득찬 활발하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자. 경쟁과 우려라는 국가 및 행정부의 태도를 바꾸고 협력, 열정, 젊음의 환희로 대체하자. 

현존하는 권력구조들이 이미 균열을 일으켰고 자신의 안티휴머니스트적 의제들을 드러내었으니, 현재와 미래는 사랑과 행동에 대한 호소로 채워져야할 것이다. 우리의 학문공간들은 권력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며, 그것은 해방의 도구로서 환수되어야 한다. 휴머니스트들인 우리는 모든 종류의 가능한 세계들을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다. 이 가능한 세계들을 현실로 바꿀 때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고자, 우리를 분리시키고 소외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떨쳐내고자 학부를 점거하고 있다. 그러한 죽음 대신 우리는 우리 입에 채워진 재갈을 벗어버리기로,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형성되었음을 세계에 알리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생각하고 성찰하고 비판하는 다중이다. 우리는 심장박동이 주먹과 입맞춤의 상호작용으로 다져진 세대이다. 

이것은 대학을 지키자는 호소가 아니라, 수평적이며 위계적이지 않은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새로운 어떤 것으로 다시금 의미를 부여하자는 호소이다. 

우리의 행동은 다양함에 대한 호소이며, 우리의 교육공간을 정의하는 복수성에 대한 호소이다. 그것은 새롭고 상이한 세계들, 나라들, 도시들, 다중들, 공간들에 기여하는 모든 유형의 풍부한 지식 전체이다. 


우리는 위기와 주변화의 자녀이며, 억압과 약탈의 경제체제의 자녀이다. 우리는 참여를 비난하고 위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정치체제의 후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권리들을 위한 길을 개척한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 절멸에 직면해있는 그 혜택들을 위해 땀과 피를 지불한 사람들의 기나긴 전통의 계승자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이 우리가 세우고자 노력해온 것을 갖도록 푸에르토리코 대학을 탈환하는 중이다. 그것은 지식의 다양성,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그리고 우리가 창조하기로 선택하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관점들의 다양성이다.

국가와 대학 행정부가 공유하고 있는 재정적 집착은 교육을 소비재의 생산라인으로 생각한다. 인문학은 생산라인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기적 임금인상에 따른 제거대상이 되었다. 

인문학이 제공하는 것이자 국가와 대학 행정부가 무시하기로 한 것은, 비판적으로 될 기회,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할 기회, 소리·색깔·퍼포먼스의 세계에 형태를 부여할 기회, 우리의 말과는 다른 말로 쓰여질 기회이다. 교육은 자본의 좁은 시선이나 시장의 변덕스런 기분을 통해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교육은 고분고분한 주체와 무비판적인 자동기계를 재생산할 뿐이다.

그 기계를 부셔버리자!

우리는 교수와 학생 간의 협력적 유대 속에서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낳는, 해방적이고 유익한 교육을 제안한다.

우리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 즉 가르치는 사람들과 배우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교육을 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동사[가르치다, 배우다]를 선생과 학생에게 부과된 역할과 혼동하지 말자. 그것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교육은 써발턴과 주변화된 사람들을 학문의 주체로 포함해야 한다. 이주민,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여성, 남성, 나이가 많은/적은 사람. 


이러한 참여적·민주적 교육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학문과 그 주체들 간의 강한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연대는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으로가 아니라, 옆에서 구축된다.

옆사람을 안아주고 그/녀의 귓가에 당신이 그들의 존재를 긍정하며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이라.

상상과 변화의 결실을 낳을 기름진 토양에 내린 뿌리들처럼 우리의 몸을 서로 뒤얽자.


우리 손으로 존엄과 존중의 풍경을 그리자.

걱정하지만 말고 옆에 서라! 점거하라! 


http://emancipating-education-for-all.org/manifesto_upr_en

twitter @ISM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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